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고래 Nov 08. 2020

온전히 바라본다는 말

펀딩 비하인드 스토리 2

온전하다 穩全하다 [온ː전하다] 

1. 형용사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하다.
2. 형용사 잘못된 것이 없이 바르거나 옳다. 
[표준국어대사전]


온전하다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생각보다 자주 사용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에도 나오고, 자주 가는 동네 펍에서도 인사말로 종종 "온전한 시간 되세요"라고 해주시는데요.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에서 왠지 모를 온화함과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처음 프로젝트명을 지을 당시에도 저 자신과 다른 이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어 사용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실제 과정은 저의 상상과 달리 순탄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속했던 집단을 통해 습득한 관점이나, 행동들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기존에 직장에 소속되어 제품을 기획하고 디자인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착했던 부분은 "숫자"입니다. 한때는 팔리지 않는 디자인은 대중이 원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실패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생각의 저변에는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선보인 작업이 팔리지 않아 재고로 쌓여버린 경험이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학부 시절부터 교수님들이 누누이 강조했던 "예술과 디자인의 영역은 다르다"라는 말을 사회의 경험을 통해 크게 깨닫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저와 함께 합을 맞춰온 사람들의 노력까지도 헛수고가 된 것이 아닌가 싶어 심한 자괴감을 느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었던 다양한 시도를 최대한 자제했던 것 같습니다. 혹여나 괜한 시도로 인해 대중이 그걸 못 받아들이면, 그 결과가 수치로 반영되기 때문에 그게 너무 두려웠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한동안 했던 작업들은 주로 소재의 기능 중심에 집착하거나 최대한 많이 팔릴 수 있는 SPA 브랜드에서 볼 수 있는 평이한 디자인을 선호했었습니다. 


반면 디자인 이외의 소비자 분석이나 유통 전략을 짜는 방향에 더 큰 관심을 가졌는데요. 덕분에 옷이 만들어지는 시작과 끝의 전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잘 팔리는 제품 전략에 민감해졌습니다.


다만 문제는 이 틀에 갇혀 돈이 되지 않는 다양한 시도들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저도 제가 이런 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선은 사업의 안정성을 중요시하는 대기업들만 가진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올해 은평문화재단의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만난 동료 작가님들과의 대화 과정을 통해 저 자신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누빔 자켓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존에 해오던 방식과 내면의 목소리 간에 끊임없는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우선 가장 큰 내적 갈등이 있었던 부분은 모델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처음에 모델 경험이 없는 중년 여성과 선천적 시각장애인 지인과 함께하겠다고 주변에 이야기했을 때 부정적인 반응들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취지는 좋지만,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가 아닐 것이라는 우려들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만약 촬영을 해야 한다면 전문 헤어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부르거나, 스타일링에 굉장히 많이 신경 써야 할 것이라는 의견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녔습니다. 다만 본래 작업의 취지가 저의 이웃들과 시각장애인 지인이 만나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그 과정 자체를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불편할 수 있는 상황들을 자연스럽게 조성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 도전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진에서 실제 낯선 이를 만난 것에 대한 약간의 어색함과 동시에 따뜻한 이미지가 담기게 되었지요. 


이외에도 유사한 갈등을 디자인 확정 단계에서도 겪었습니다. 처음 디자인을 가족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굉장히 많은 양의 피드백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대중들이 받아들였을 때 불편하거나 낯설다고 느끼는 지점들이 꽤 많은 옷이다 보니 이를 우려해서였는데요. 저를 가장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의 말이었기에 무시하고 지나칠 수가 없어 한동안 디자인을 다시 수정하기 위해 깊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공장 사장님께서 너무 깊게 고민하는 저에게 모두가 팔리는 것에만 집중하면 어느 누가 시도라는 것을 해보겠냐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셨지요. 저에게 필요한 말이었기에 정말 감사했지만, 받아들이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동안은 제가 작업한 디자인이 입는 사람을 어떻게 보이게 했으면 좋겠는지 되짚어 보았는데요. 초기 작업 의도는 입는 사람이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거나, 신년의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인척들이 서로를 맞이할 때 꺼내 입는 귀한 옷의 이미지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실제로 예전에는 아기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엄마가 동네 사람들에게 한 땀씩 여러 땀을 모아 누비 기법으로 배냇저고리를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전장에 나가거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안녕을 기원하며 한 땀 한 땀 누빔 옷 만들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현재는 손 누빔은 찾아보기는 어려워졌지만, 이런 마음이 담긴 옷을 입는 사람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작업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도에 맞게 잘 나왔지만 동시에 제가 만든 옷이 대중적으로 선호하는 디자인이 아니라는 점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머리로는 이런 형태는 잘 팔리는 디자인이 아니니 내보내면 안 된다고 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작업의 방향성에 맞다고 서로 지킬 앤 하이드 마냥 끊임없이 싸웠던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펀딩을 올리고 나서도 그 가치가 수치로 증명되는 것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제 작업을 온전히 지켜보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들끓는 마음 또한 외면하지 않고 이 글을 쓰면서 온전히 되짚어 보고 있는 중입니다. 


좋은 습관이 들려면 최소 100일은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벌써 이런 과정을 7개월째 지속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이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고 꾸준히 들어주신 덕분입니다. 


한때는 목소리를 내서 자신이 입지를 견고히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니 그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걸 올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더욱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알아가야 할 것도 궁금한 점도 많아 이야기가 길어지겠지만, 긴 호흡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김고래 드림. 


Photo by 김다혜


*11/4일부터~11/22까지 펀딩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진행한 결과물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로 접속해 주세요.


https://tumblbug.com/0603


*혹시 주변에 시각장애가 있으신 분이 있다면 아래 펀딩용 링크로 공유해주세요. 


https://stib.ee/r0d2


*이 콘텐츠는 출처를 밝히지 않은 무단사용, 2차 편집, 상업적 용도의 글 인용을 금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