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로서 배운 것
올 한 해 진행한 프로젝트 온존은 비록 많은 분들이 저에게 질문 주셨던, 브랜드를 운영하거나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되는 옷을 만드는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옷은 가격대도 비쌌고, 디자인도 보편적이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이 옷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기업 소속으로 있을 당시에는 기업의 입장과 태도로 바라보았던 것들이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또 다르게 보게 됐고, 많은 부분을 반성하고, 온전히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에는 누빔자켓을 만들어주신 공장 사장님의 영향이 굉장히 컸습니다. 저는 사장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항상 공장과의 관계가 불편했습니다.
기업 소속으로 있을 당시 제품을 기획하거나 관리하는 과정에서 제가 가장 민감하게 여겼던 부분은 생산의 납기일과 퀄리티 문제였는데요.
패션 영역에서는 대중이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가격대와 형태를 갖춘 제품을 공급하는 것이 브랜드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항상 생산 납기와 제품 퀄리티 문제로 공장과 분쟁이 잦았기 때문인데요. 특히 공장 측에서 일정 이상 퀄리티를 유지하거나, 납기일을 지키려는 노력이 안 보일 때 그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워낙 빈번한 문제였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생산 시스템의 대부분이 자동 기계화 방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애초에 한국의 패션 브랜드들이 대부분 선택하고 있는 생산 방식인 OEM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빠른 시간 내에 최대 생산을 위해 사람의 노동력을 기계화한 시스템을 선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부합하지 못하고 문제의 원인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면 대체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다가 기업을 벗어나 창작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는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선순위가 변경되었습니다. 패션 산업 내에서 빠르게 소비하고 소비되는 것에 지치기도 했었고, 한 번이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에서 완성도 있는 옷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옷 자체가, 하나의 소모품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을 연결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 시도 중 하나가 옷 위에 점자를 올리고 펀딩을 통해 외부로 노출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제 작업을 통해 점자가 시각적으로 거부감 없는 형태이지만 동시에 시각 장애인들에게 기본 정보를 제공하는 좋은 레퍼런스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기업이나 브랜드들이 시각장애인들에게 기본정보를 제공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였지요.
기존에 시도해 본 적이 없던 이번 작업을 함께 해줄 공장을 찾을 때 시간당 공임을 기준이 아닌 한 벌을 제대로 만들 분을 찾다가 이번 작업을 함께 해주신 사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분과 일을 하면서 그동안 굉장히 기본적이고 당연한 이야기를 잊고 있었던 걸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좋은 제품이 나오려면, 작업자에게 그에 합당한 기회비용과 대우, 충분한 인건비를 제공하면 그에 상응하는 제품이 나온다는 점인데요.
작업을 맡아주신 사장님의 경우, 서울 창신동에 있는 이음피움봉제역사관에서 2018년도에 재단 장인으로 소개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부에서 장인으로 소개되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장과 일을 할 때 시간당 인건비로만 서로를 대하지, 이분들이 드린 노고와 경력을 인정하는 경우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드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옷을 잘 만들든 못 만들든 간에 시간당 계산되는 낮은 인건비와 기계와 같은 대우 때문에 작업자들 입장에서는 옷을 공들여 만들 이유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저 기업도 생산 작업자도 그 안에 사람은 없고 서로가 서로를 돈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구조가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것이지요. 이로 인해 생산 영역이 전문 기술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우를 받는 부모 세대의 작업자들을 오랜 기간 봐온 20, 30대들 또한 산업이 작업자를 대하는 태도를 답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기존의 제가 어떤 태도로 산업 내의 작업자들을 대했는지 깊게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사장님은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 내내, 처음 시작을 응원해주시는 지지자이자, 조력자였습니다. 저는 이분과 완성도 있는 옷을 만들기 위해 충분한 테스트와 개발 논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생산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할 수 있는 로스분에 부담을 갖지 않으시도록 개발비로 인정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완성도를 갖추려고 노력했습니다.
비록 이런 노력에 비해 펀딩의 결과는 안타깝게도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는데요. 저는 왠지 저의 첫 시작을 지지해 주신 사장님께 민폐를 끼쳤다고 생각해 굉장히 죄송했습니다. 애초에 소량인 제 작업을 생산하는 것보다 같은 공임이면 더 많은 물량을 잡는 것이 사장님의 생계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오히려 사장님께서는 처음 시작이 잘 되었으면 제 기도 살고 좋았을 텐데, 실망을 많이 하지 않았냐며, 저를 더 걱정해 주셨고 민망하면서도 굉장히 감사하고 동시에 부끄러웠습니다.
올 한 해 겪었던 이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저는 한 벌을 만들더라도 사람을 위한 옷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단순히 특정 시기에 특정 제품이 합리적으로 나와야 한다는 태도보다, 하나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만드는 사람과 입는 사람 간에 서로의 관계성이 인정되고,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앞으로 어떤 운영방식을 선택해야 될지, 그리고 언제 결과가 나올 수 있을지는 아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년에도 저는 이런 과정들을 실험하고 고민하는 창작자의 포지션으로 여러분을 뵙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김고래라는 사람이 대안을 찾아가고 형성하는 장기 크라우드 펀딩이라고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시고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지켜봐 주신 것 자체가 저한테는 엄청난 후원이고 지지였습니다. 돌아오는 새해에는 제가 더 잘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고민하기 위해 대략 한 달 정도 메일을 쉬고자 합니다.
아마 2021년 2/2(금)에는 고민했던 것들을 어느 정도 정리한 새로운 형태로 찾아뵙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2021년 2월에 뵐게요!
다들 무탈하고 평온하시기를!
김고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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