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감각 시리즈 인터뷰
늘과의 관계는 올해로 6년 차입니다. 제가 처음 늘을 만났던 곳은 “언니네 무용단”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에서였는데요. 일반인 대상의 즉흥 무용 클래스에서 진행자와 참가자의 관계로 만났습니다.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에도 느슨하면서도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왔지요.
이런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 활용하고 있는 수단은 달라도, 추구하는 방향성이 유사했기 때문인데요.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쉽게 소비되고 마는 상품화된 몸과 단발성의 체험형 관계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하고 이야기 나눠 왔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과의 지속 가능한 관계에 대해 탐구하는 작업을 해온 공통점이 있죠.
총 5번의 걸친 “몸 감각 시리즈”를 정리하며, 실제 삶에서 이 과정을 체화하고 있는 사람 늘을 당신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안녕하세요. 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몸이라는 큰 주제 아래 세상과 연결되는 다양한 지점을 찾고, 관계를 맺는 늘이라고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재능을 알아봐 주신 선생님의 권유로 처음 춤을 시작했는데요. 인생 전반기 동안 감정 표현을 말로 하는 것에 서툴렀던 저에게 있어서 춤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로서 함께 했습니다. 그러다 제 인생을 성찰하고, 삶의 성숙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춤보다는, 삶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는 '몸'으로 관심을 좁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다양한 공동 작업을 해오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하고 계신 작업들을 소개해 주세요.
제가 진행해온 작업들은 몸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의 몸, 더 나아가 우주와의 관계성을 찾아가는 탐구를 지속해 왔습니다.
그중 "툿 네트워크"라는 몸을 매개로 한 탐구하는 모임을 1달에 1번씩 3, 4년 넘게 진행 중인데요. 올해 들어서는 식물이 가진 몸을 관찰하고 보살피면서 나의 몸 또한 함께 되돌아보고 사유하는 공동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정해진 종료 시점 없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각자가 원하는 식물을 정해서 관찰합니다. 이후에 관찰한 식물과 개인의 몸 간에 어떠한 연결지점이 있었는지를 공유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지요.
그리고 작년 10월부터 새롭게 시작한 공통 작업으로는 “늑대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프로젝트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본연의 몸을 늑대라는 동물이 가진 자연성과 야생성을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에는 총 8명의 각기 다른 수단을 활용하는 (무용 치료, 사운드 아티스트, 안무가, 설치 예술가 등등) 아티스트들이 함께하고 있죠.
제가 진행해온 작업들의 공통된 지향점은 주체적인 개인들의 수평적이고, 지속 가능한 관계를 탐구하는 것인데요. 개인적으로 옛날부터 권력 내의 수직적인 관계를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해온 작업이나 모임들은 모두 리더 없이도 자율적으로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를 해왔죠.
현재 활동명인 “늘”도 가늘지만 건강하고 변함없는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짓게 되었습니다.
무용수, 안무가의 삶은 개인의 활동이 화려하게 주목받는 직군으로 비치기도 하는데요. 이와 달리 일반 사람들의 삶에서의 체화와 관계성을 중시하는 공동 작업을 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현대 사회는 몸을 시각적으로 보이기 위함이나, 단련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으로 대상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관점은 개인이 자신의 몸 감각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며, 더 나아가 세상과의 연결을 단절시켰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한때는 제 몸 감각과의 연결이 끊겨, 삶에서 몸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아이가 자라날 주변 환경의 문제점들을 다시 한번 되짚고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원인에는 개인의 몸, 사회, 자연 간의 연결이 끊겼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 간에 지속 가능한 연결이 가능하도록 탐구하고 작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이 작업을 위해서는 함께 공유하고 이 과정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작업에 뚜렷한 목적성과 설득력이 필요했죠. 평소 저는 말보다는 몸으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인데요. 더 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상에서 몸으로서 직접 실천하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리고 실천 과정들을 언어로 구체화하는 연습을 하며 글이나, 책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항상 몸과 함께하는 삶을 실천 중인 늘도, 삶에서 자신의 감각을 체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계시네요. 하물며 일반인들이 개인의 감각을 자각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늘은 언제 가장 자신의 몸이 가진 감각을 예민하게 느끼나요?
최근에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요. 이 책에서 나온 이야기 중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몸과 의식이 분리된 상태를 지속하다가 이를 연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 게 "자신의 몸이 아플 때"라고 해요. 저는 이 부분이 나이 듦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부터도, 나이가 들면서 이전과는 달라진 자신의 신체의 쇠약함이나 병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지 깊게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 몸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노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자신의 신체 변화에 대해 심리적인 불안함을 느끼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어요. 아마도 노쇠함으로 인해 이전만큼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두려움과 공포감으로 읽혔는데요.
아픔을 느끼는 제 몸과 노화의 과정에서 불안해하는 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깊게 고민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기공"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기공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무용은 기공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겉으로 보이기 위한 동작에 집중해서, 몸을 돌보기엔 표면적인 측면이 있었어요. 그래서 숨을 매개로 좀 더 깊이 사람이 자신의 몸을 되짚어 볼 있게 안내해주는 도구로 기공을 선택하게 되었죠. 그리고 현재 동네를 기반으로 기공 수업을 진행 중입니다.
다만 동네를 기반으로 사람들을 모집하는 일이 쉽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생각보다 몸의 감각을 관찰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거든요.
동네에서 이 작업을 하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우리가 심리적 거리가 먼 사람들하고 주로 개인적인 이야기보다, 연예인 이야기,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 대화는 또 기억에 잘 남지 않고요. 하지만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친밀한 관계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더 삶에서 오래 기억에 남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와 유사하게 저는 삶에서 체화를 위해 실천을 하는 초반에 과정을 지나치게 넓고 거시적인 범위에서 시작하고 싶지 않았어요. 오히려 나와 더 신체적 감각을 깊이 있고, 친밀하게 나눠온 가까운 관계부터 돌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동네를 기반으로 기공 수업을 하게 되었죠.
얼마 전 굉장히 화제가 되었던 영화 “기생충”에서 계층 간의 사회적 거리를 “냄새가 선을 넘는다”라는 대사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냄새는 후각이고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이를 누군가를 차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현실에서도 빈번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주변에 쉽게 볼 수 있는 예시로는 “노인 냄새”라는 표현이 긍정적인 경우보다 부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늘은 이런 사회적 혐오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근에 진행 중인 늑대 프로젝트에서 관계의 동물인 인간이 호감을 쌓아가는 과정은 거리에 비례해서 형성된다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체취, 생김새, 접촉 등의 탐색을 통해 친밀감을 형성해 간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서로를 알아가고 친밀함을 형성하기 위한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엔 코로나 19로 인해 더욱더 그렇고요.
이 과정들을 지켜봤을 때 현대 사회에 들어 상실하게 된 감각은 “후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각자의 고유의 체취에서 나오는 땀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공중보건위생에 따라 개인의 고유한 채취는 불결하고, 관리되지 못한 몸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냄새를 유발하는 것은 청결하지 않음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공식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로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고 특정 집단을 혐오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하죠.
안타까운 점은 개인이 가진 고유의 체취를 감각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면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데 훨씬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배된 감각이 있다는 것은 삶에서도 선택이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니까요.
현대 사회에서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가진 몸 감각들을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건, 이 기준에서 벗어나면 주체성을 가진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됩니다. 이러한 사회적 시선에 대해 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리가 잘 된 사회=불편함을 더 이상 견디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살다 보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보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어찌 보면 이런 점들이 자연스러운 일이죠.
왜냐하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은 혼자만의 삶이 아닌 주변 환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만약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아이, 노인, 장애인, 동물 등 모든 것들이 다 불편해지기 시작할 거예요.
그리고 불편함을 못 견딘다는 건 마치 눈앞에 벌레가 날아다니면 죽이는 것처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겠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지요.
사람은 자신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불안하면 주변을 통제하려고 든다고 해요.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개인이 불안정한 건 외부와의 연결이 끊겨 알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한 것에서 오는 불안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통제하지 못해서 불안한 게 아니라, 연결이 끊겨서 예민하게 느끼지 못해 불안정한 것으로 생각해요.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려면, 삶에서 어떠한 자세가 필요할까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서 함부로 단정 지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불편함이라는 건 내 몸이 가진 감각에 집중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신호이죠. 되짚어보면, 세상과의 연결성은 무딘 감각이 아닌 날 선 감각 아래 있을 때 자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필요한 태도는 "모든 관계는 절대 알 수 없다"는 전제하에 "평생 알아가고자 하는 자세”라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알고, 익숙해진 순간 더 이상 그 감각에 몰입할 이유가 없어지면서, 연결이 단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이나 타인의 몸을 함부로 안다고 단정 짓지 않아야 하죠.
항상 무의식 중에 자신의 태도가 누군가를 배제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일어서는 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말로 먼저 뱉는 것이 아닌 몸으로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의미인데요. 여기서 실천은 꼭 움직임이나, 춤이 아니더라도, 내 주변의 가족을 돌보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 자신의 몸 감각에 대한 자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고, 이를 대화로 나누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사회적 분위기 형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운영 중인 PROJECT_ON_ZONE의 지난 이메일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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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진행_고래, 너굴
글, 편집_고래
원고 감수_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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