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
어수선한 책상 위로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분주했다.
잠시 후, 반짝거리는 메신저 위로 작은 숫자 '1'이 떴다.
[ㅇㅇ ㅎㅎ]
'응!'
이응 자음 두 개가 홀리듯 '응'으로 읽혔다.
'그래, 급한 것도 아닌데 뭐, OK'
그렇게 메신저를 끄려는데, 뒷말에 눈길이 갔다.
'ㅎㅎ'
두 개의 [히읃]
'하하? 흐흐? 히히? 흠, 뭐지?'
그 순간, '모음'에 대한 측은지심에 발동이 걸리고 말았다.
바쁜 월요일 아침, 감정이 극에 떠밀려 좌초 상태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난 답에 답을..
'하하하'
쓰려다가, '탁! 탁! 탁!'
딜리트(delete)를 눌렀다.
순간, 지워진 글자가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하하"
두 개의 'ㅎ'이 문제랄 건 없었다.
영문모를 내 꼬장이 그렇다고 해서 'ㅎ' 두 개에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비속어도 아니고 비난받을 말은 더욱 아니니까, 줄임말은 아주 오래된 자연스럽고 재미있는 현상이니까.
문제라면,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훈민정음 서문)
나랏말씀이 중국에 달라 문자와로 서로 사맞지 아니할새 이런 전차로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배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시러 펴지 못할 놈이 하니라. 내 이를 위하여 어엿비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맹가노니 사람마다 하여 수이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글자를 만든 것은 편안한 소통을 위한 것, 분명 줄임말이나 신조어는 친밀한 소통을 하는 데에 편리하다. 하지만 이것은 트렌드처럼 성향이나 기호와 같아서, 물론 내 생각이지만, 난 드물게 사용하는 편이었다.
어느덧 손가락은 모음, 줄임말, 신조어를 빠르게 검색하고 있었다. 내 꼬장이 더 옹졸해지는 전에 흔들리는 평정에 중심을 잡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한글 모음은 낱말의 뜻을 구별하고 음절을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하며, 폐에서 내쉬는 숨소리에 천지자연의 우주를 담아 하늘과 땅과 사람을 본떠 만들고 혀의 높이와 위치, 입술 모양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기록을 보면, 모음은 허파에서 올라온 공기가 구강통로에서 폐쇄나 마찰에 의한 장애를 받지 않고 성대의 진동과 함께 나오는 소리이다. 자음(子音)과 대립되는 말로써 ‘홀소리’라고도 한다. 음소로서의 모음과 구별하여 ‘모성(母聲, vocoid)’이라고도 한다.
(모음(母音)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535 발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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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어가 처음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PC통신의 도입시기다. 초기 인터넷 통신환경의 불완전함 때문에 통신 요금이 시간에 비례해 부과됐다. 따라서 빠른 의사전달을 위해 줄임말과 초성 사용이 시작됐다. 이때 생성된 것이 방가, ㅇㅇ, 하이루 등과 같은 단어다. 이후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인터넷 사용이 대중화되어 신조어는 더욱 활발하게 생성되고 사용됐다. 신조어는 세대 간 유대감을 형성하고 언어의 다양성을 높인다. 하지만 몇몇 신조어는 직관적이지 않아 세대 간 의사소통을 힘들게 하고 대화 과정에서 비속어와 혐오 표현이 유행하는 언어라는 이유로 비판적 인식 없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말이 새롭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옛날부터 지속돼 온 당연한 현상이다. 오히려 언어 사용을 규제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를 두고 소강춘 전 국립국어원 원장은 “국립국어원의 입장에서는 쓰면 안 된다고 얘기해야 하지만 언어학자의 입장은 다르다.”라며 “이런 현상은 한글 고유의 특징과 더불어 디지털 문화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한 상황에서 발생한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신조어의 사용은 언어 그 자체의 관점에서는 파괴지만, 사용하고 활용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일종의 문화라는 것이다.
(신조어, 언어 파괴와 문화 사이 https://times.seoultech.ac.kr/reports/?category=60&idx=20703 발췌 편집)
더부룩한 속이 내려가고 고요해진 기분이 드는가 싶었는데, 무심히 떨구어진 내 두 눈은 키보드 'ㅏ'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도, 난 '하하하'가 좋아, 그 정도가 아니면 "^-^"으로 하던지..'
내가 원한 건, 분명한 표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었다. 어떤 관계에서는 애매모호한 표현이 오해를 만들기도 하니까, 그럴 바에야 격식을 차리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도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그것도 그럴 일이었다.
어떤 순간이나 상황에 따라, 'ㅎㅎ', '^-^' 또는 큰 웃음의 표현은 문장 끝에 오는 '마침표'처럼, 당연하지만 때로는 없어도 그저 그렇다고 느껴질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한편, '말'은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영향력이 달라지기도 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로 유명하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으로 인용했던 말이라 내게는 더욱 강열했던 말이다.
'창의적인 것'은 사소함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발견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눈 뜨자마자 뻥긋한 한마디 한마디에 모조리 그 가치와 창의성을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한마디는 어떤 상황을 만나 비로소 그 사람과 그 말을 빛나게 하거나 혼쭐 내기도 한다.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내 말도, 그런데...'
그런 생각에 미치자, 구겨졌던 내 미간 주름이 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자음 "ㅎㅎㅎ" 대신에 모음 "ㅏㅏㅏ"를 쓰면 어떨까?'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고, 창의적인 줄임말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엉뚱함이 달음질쳤다.
단어의 의미가 통하려면 모양도 공감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슬픔을 표현하는 "ㅠㅠ"는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닮았다. 이것은 모음만으로도 단번에 이해된다.
하지만 'ㅏ'는 그것만으로 웃음을 표현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아'로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ㅇㅇ" 뒤에 "ㅏㅏㅏ"가 오면 "하하하"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까?'
자문 하는 순간, 모음이 가진 운명 같은 것이 느껴졌다. 모음에게 이입되는 나를 보고 있자니 또 다른 측은지심이 들었다.
결국 해석은 수신자의 몫으로 남는 것일까?
어쩌면, 말의 생명력이나 성장은 부모 자식 사이와 같이 어쩔 수 없고 어떻게 될지도 모를 일일지 모르겠다.
마치 우리 사는 모습처럼 자음과 모음은 공생 관계로 느껴진다. 앞장서는 든든한 자음 곁에 모음은 확실히 한몫을 한다.
'모음아, 널 응원해 ^-^'
서로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공감해 줄 때, '따로 또 같이'는 더 멋진 일이 될 수 있겠지.
비가 오면 우산을 챙기는 것도 좋지만 그냥 비를 맞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고, 비 맞은 옷을 뽀송하게 잘 말리는 것도 또 하나의 사는 방법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음이기도 하고 모음이 되기도 할테니까.
따로 또 같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자음아, 고맙다.'
브로콜리너마저 "혼자 살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