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에 일어나 얼굴에 물을 묻히고 수건으로 닦다가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지난밤 자다 깨다 대여섯 번은 했던 탓인지 눈 밑에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헉! 다크가 있어요!"
5살인가 6살이었던가, 어린 조카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눈 밑에 다크서클을 지적했다.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내 눈 밑을 가리키며 다크를 발견하고 놀라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이 어린 녀석이 그런 단어를 어떻게 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내게 눈 밑 다크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잠은 죽어서 자는 거라는 생각이었다. 특히나 일하지 않는 개인적인 시간은 철저히 더더더 더 많이 즐기려고 애썼다. 그래서 잠이 오는 순간을 떨쳐 내려 노력하곤 했다. 하루가 30시간쯤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했다. 잠을 원망하면서 말이다. 아직도 그렇긴 하다.
그러던 내가 언제부터인가 ‘잠’을 잔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낀다. 그것도 질 좋은 잠에 대해서 말이다. 몸이 너무 피곤하거나 생각이 많으면 오히려 금세 눈을 뜨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고 하루를 꼬박 많이 움직이면 기절해서 자기도 하면서 몸이 원하는 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잘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고 늘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것은 수십 년 그렇게 살아온 습관이 체득된 탓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관리하기 나름이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물학적인 시간을 거스르는 일은 인간의 노력으로 따라잡기 어려운 고차원적인 수준이라는 것을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몸이 보내는 신호들이 잦아지고 그것을 자주 좀 더 예민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한 몇 년 전에는 우연히 거울을 보다가 미간 주름을 발견하고 당황한 적이 있다. 그리고 더 오래전에는 복도를 걷다가 만난 동료로부터 입사 때 보다 어깨가 앞으로 말린 것 같다며 걷는 자세가 달라졌다는 애정 어린 말을 듣고는 나를 너무 방치했다는 자책을 하고 고치려고 의식하며 지내기도 했었다.
미간 주름은 내가 보기에도 우울해서, 동생이 알려준 동작을 꾸준히 하다 보니 생각보다는 빨리 가셨다. 하라고 하면 하라는 대로 최선을 다하는 게 또 나다. 눈가 주름은 눈을 뜨고 웃는 연습도 해 봤지만 이마에 주름이 지는 것 같아 그런대로 그냥 가지고 살기로 했다. 입가 주름은 볼을 부풀리거나 손으로 자극을 줘 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내가 원하는 위치에 주름이 잡힐 수 있도록 말과 입모양을 신경 쓰는 것으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눈 밑 다크, 이것은 그래도 해결하고 싶은 아직은 풀지 못한 문제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어쩐지 외모에 무척 신경을 쓰는 것 같은데, 내가 외모나 패션 이런 것과도 굉장히 먼 사람이라는 것은 다크 서클을 발견한 내 어린 조카도 알 것이다. 물론 아주 개인적이긴 해도 내가 바라는 얼굴상은 있다.
기술이다 의술이다 좋은 것도 많지만 좀 모순되기는 해도 내가 아는 나는 있는 그대로 늙고 싶은 자연주의자였다. 나에게는 언젠가부터 막연히 꾸는 꿈이 있다. 상냥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상냥하지만 말도 행동도 생각도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은 것, 어쩐지 별일 없다면 삶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크고 상냥하고 자유롭기는 내몫인 것이라 나에겐 꿈이 되었다. 그래서였는지 언젠가 들었던 링컨 대통령의 말이 주는 영향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우선 인상은 좋고 볼 일이라고 말이다.
Every man over forty is responsible for his face. - Abraham Lincoln
나이가 들수록 삶의 태도가 얼굴에 드러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그 사람의 말과 얼굴에 드러난다고도 하는데, 지나온 세월 동안 수없이 사람들을 마주치면서 거울치료를 받은 것으로도 이 말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믿고 있다.
이제는 밤을 밀어내고 낮을 길게 가져가려고 애쓰는 것을 다르게 생각하며 사는 것 같다. 어둠을 쪼개 먹는 방법, 나의 다크 나이트를 다스리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다 보면 눈 밑에 내려앉은 어둠에 대한 수수께끼도 그 실마리를 찾아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