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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그래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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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용 Oct 19. 2024

포용되는 모순

정말 오래전이다. 할머니와 살던 시골집에서 국민학교까지의 거리는 그 당시 내 걸음으로 20분 정도였던 것 같다. 저 멀리 산이 보이고 논과 밭 옆으로 나 있는 그 길을 걷는 것이 나는 좋았다. 친구들과 한바탕 운동장에서 놀고 돌아오는 길은 살짝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 길 위를 걷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생각들이 나의 또 다른 놀이가 되었다.


‘시간은 뭘까?’, ‘내 속의 나는 얼마나 많은 내가 있고 그중에 어떤 것이 진정한 나일까?’


짐작해 본다면 시간에 대한 생각은 학교를 오고 가며 보게 되는 풍경 덕분에 든 것이었고, 진정한 나에 대한 물음은 어린 마음에 친구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에 들었던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면 좋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명사를 찾는 여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어린 시절 시골길을 걷던 날처럼 그런 계기가 자연스럽게 찾아드는 일은 무척이나 행운처럼 느껴진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기념하고 싶은 날을 작정하고 나선 지난 어느 하루에 나는 뮤지컬을 보고 집에 가는 차편이 여유가 생겨 바로 한 정거장 차이에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갔다. 연말을 기념하려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서울에 살지 않아 좀처럼 보기 드믄 장면 이어서일까, 나는 점점 흥분되었다.

바이올린 소리에 이끌려서 간 곳에는 뼈대만 갖춘 2층으로 지어놓은 구조물이 보였다. 1층에는 국악, 2층에는 바이올린이 함께 절묘한 음악을 만들어 내고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호응하고 있었다. 나도 수줍게 참여하며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웅장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음악에 빠져 있는데, 어느 순간 들리기 시작한 비트가 강한 음악 소리로 시선이 돌려졌다. 따라가 보니 나중에 안 것이지만, KCON이라는 곳에서 주최하는 페스티벌이 진행되고 있었다. 단 몇 초의 짧은 K-POP이 나오면 일반인들로 보이는 다양한 국적과 연령의 사람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빠지기를 반복되고 있었다.


역시나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최 측에서는 사고가 나지 않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길을 터주고 막기를 반복했다. 장관이기도 했지만 춤에도 관심이 있던 나는 진행자의 안내를 받아 계단에 올라가 적당한 자리에서 서서 그 흥겨운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 앞사람 머리 사이로 목을 길게 뺐다. 이제는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런 줄도 몰랐다.


“신기하네, 소리가 겹치질 않아.”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랬다. 두 공연은 사실 하나의 공간, 크게 트인 한 공간을 나눠 이뤄지고 있었다.


각자의 개성들이 독립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상황에서, 바이올린 소리도 좋고 K-POP 댄스를 보는 것도 좋아하는 나는 그저 순간순간을 즐기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여운으로 남은 누군가의 그 한마디는 돌아오는 차 속에서 고단했던 나를 쉬지 못하게 했다.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란 말이 떠올랐다.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나는 손가락에 힘주어 검색창을 눌러댔다. '모든 사람이 존재하는 지금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들 모두를 오늘날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외부적으로만 똑같은 지금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동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고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한 말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 다 같이 존재한다고 해서 같은 생각과 같은 감각을 함께 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내 속에서 가지는 생각이나 감각조차도 일관성이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나는 그렇게 수많은 모순으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과 행동의 앞뒤가 일치되지 않는 창과 방패라는 뜻의 '모순'이라는 단어가 무척 공감되었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겉모습과 행동, 생각들이 어쩌면 다양하다 못해 서로 모순되어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나쁘거나 비정상적인 것도 아닌 각자가 가진 개성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내게 모순이라는 단어로도 표현되는 것 같았다.


일관되지 않은 나의 다양한 생각과 행동, 내가 가진 수많은 나를 품고 살아가는 오늘도 나는 다른 무엇과 충돌하면서 또 다른 나로 깨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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