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디딩~
마트에 주문한 것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현관에서 봉지를 들고 와 서둘러 냉장고에 넣을 물건들을 꺼냈다.
"응?"
사과 봉지를 꺼내는데 사과의 개수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4개야? 4개~7개라고 했는데~”
코로나19 팬데믹 당시부터 더욱 자주 이용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온라인 주문이었다. 틀리게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 다름에 당황스럽고 서운했다. 순간 옆에서 하는 말이 들려왔다.
“반으로 잘라서 먹으면 되겠네.”
그 말에 뇌가 일시 정지되었다가 바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하는 말은 분명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내 기준에서는 반으로 잘라서 먹으면 된다는 그 말도 안 되는 그 말이 그 순간에 정답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쓰느냐는 것은 어떤 물건에 국한된 말이 아닐 것이다. 언어는 어떻게 보면 말을 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자주 느끼는 것인데, 대화를 하다 보면 마치 스무고개를 하듯 단어를 찾아 헤맬 때가 있다.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단어를 내가 다 기억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엄마와 대화를 할 때도 그렇다. 엄마는 한 번에 모든 딸의 이름이 부르지만 누굴 부르는지는 너무 명확히 알아듣는다. 뭐라고 해도 제대로 알아듣는 경우가 세상에 은근 참 많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전문가답지 못해 보이기도 할 것이고, 엉뚱해서 왕따 당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대화의 기술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들으려 하지만 들리지 않는 것이 맞다. 간혹 한자리에 모여 같은 주제로 동의가 된 결론을 내리지만, 불과 1~2분 차이로 그 결론은 다른 얘기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1~2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면, 몸은 그 자리에 있고 시선은 같은 곳을 보지만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으니 그런 건 아니었을지도 또 아니면 동의하진 않지만 말하기 싫거나 말할 용기가 없다 보니 같은 결론을 내었어도 전달할 때 쟁점이 다른 시각으로 맞춰지는 것일 수도 있다. 말이라는 것은 주어진 상황과 사람, 시대에 따라서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매 순간 느끼게 된다.
수많은 언어가 자아를 가진 객체를 통해 수없이 뻗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접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 꼭 이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세상은 원래 무지개 빛깔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늘은 파랗게 보이지만 파랗게 보니 파랗게 보이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너무 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아직 난 맛을 보지 못한 요즘 음식 중의 하나로 탕후루가 있다. 두려운 달콤함을 지나면 다양한 과일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고 있다. 과해 보이는 달콤함이 두려워서이다. 말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색상도 모양도 맛도 다를 수 있을지 모른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사탕발림이라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같은 상황에서 느낌의 차이로 다른 말을 하지만 어찌 보면 그 말은 그 상황에 적절한 동의어라고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로를 하나의 온전한 객체로 존중한다면 그 말은 면박을 주거나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무엇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동의어가 탄생하지는 않았을까? 살면서 알게 될 또 다른 많은 동의어들이 궁금해진다. 어쩌면 동의어를 배우는 일은 마음을 배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