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누군가의 핸드폰 번호를 다급하게 눌러댔다. 엄지손가락이 떨렸다. 아니 뇌가 진저리를 치는 것인지도 몰랐다.
“저는 거기 안 세웠는데요. 제 차는 봉고차예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차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1톤 트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번호를 반복해서 물었다. 자꾸 확인하고 싶었고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지도 몰랐다.
결국 핸드폰 번호 뒷자리에 숫자 하나를 잘못 누른 상황, 나는 반복해서 번호를 물었던 것처럼 ‘죄송합니다’를 반복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번호를 누르는데 차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연장이 든 상자를 들고 오는 무리에게 난 손가락으로 트럭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에게 난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놓칠지 모르는 열차표, 그다음 열차표를 빨리 예매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 차를 막고 있는 트럭이 빠지는 동안 난 힘들게 급히 표를 구했고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며 부랴부랴 차에 시동을 걸고 달렸다. 혹시 먼저 예매한 열차를 놓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리고 그 뒤로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내 차 뒤를 빠르게 뒤쫓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 생각했던 대로 라면 나는 일을 마무리하고 제시간에 열차를 타러 갔어야 했다. 하지만 다음 열차를 예매해야 했던 순간을 맞닥뜨린 나는 초집중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출장을 가는 것이 맞을지 아니면 하던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맞을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조차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하루였다. 아침에 문자로 받은 오늘의 운세는 의연해지라고 조언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절묘한가 생각을 하며 나는 결국 다음 열차를 예매했다. 열차를 타기까지 마치 여유라고 포장된 것 같은 15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로 문자를 하고 통화를 하며 전전긍긍했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붙들고 단도리를 치다 보니, 잠시 후 의연까지는 아니어도 요동치던 마음을 조금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몰라도 그 무게는 한참 저 바닥까지 느껴졌다.
짧은 순간에는 어떤 가치와 그 가치의 중요한 정도를 알아채는 것이 쉽지 않다. 대세에 큰 지장이 없다면 큰 문제만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고, 하루만 더 있다면 잘 해낼 것만 같은 자칭 '하루병'에 걸리고 아쉬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저 모든 미션을 모두 완수하는 데에 급급했던 순간을 자책하는 마음을 안고 나는 열차에 올랐다. 여전히 남겨진 해결해야 할 일들과 녹초가 된 몸이 극도의 피곤함을 불러왔다. 내 시선은 단조롭고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을 따라 달려갔다. 순간적으로 고개가 움직였다. 차창 밖으로 지나치던 건물 외벽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괜찮아, 미리 걱정하지 마>
교회였나, 광고 문구 같기도 했다. 하물며 저렇게 벽마저도 나를 위로하는데 이렇게 자책하고 있다니, 내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깨지고 무너져도 세상은 그대로라는 것을 알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것이 마음인 것을 알고 있지만, 이번 생은 처음이니 깨지고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텐데, 왜 이리 늘 낯설고 두려운 것인지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시간은 사람을 길들이고 사람에게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중에는 적당히 피하는 요령도 있을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모나고 몹쓸 마음의 찌꺼기 정도는 적당히 눈감고 피해 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욕심이 내 상황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때 발 밑에서 뭔가 느껴졌다. 누런 종이가 보였다. 나보다 먼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누군가가 남기고 간 종이봉투였다. 살짝 열어보니 역시나 음료수병과 종이컵이 들어있었다. 곧이어 열차 안에 도착 안내방송이 들렸다. 나는 버려진 종이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의 다급함으로 전화번호 숫자 한 개가 잘못 눌려 곤혹스러웠을 그 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그래서 더 모나고 몹쓸었을 내 마음의 찌꺼기를 담아 휴지통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