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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그래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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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용 Oct 21. 2024

의도된 실패

한 해 동안 일어난 어떤 사실이나 사업에 대하여 해마다 한 번씩 하는 보도나 그런 간행물, '연보', 나는 이 단어를 발견하고 적잖이 신선한 감흥을 느꼈다. ‘필경사 바틀비’라는 소설 뒤에 등장하는 허먼 멜빌 작가의 연보가 그것이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주인공 바틀비, 그 속에 투영된 표현하기 힘든 내 감정들을 살피던 나는 그 글 끝에 빼곡하게 기록된 작가의 긴 연보를 보게 되었다. 은둔하게 겨우 생을 이어갔던 '모비딕'으로 유명한 작가 허먼 멜빌, 그의 연보를 짚어보다가 어쩐지 바틀비의 심정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

그런데 얼마  뮤지컬 ‘The Story of My Life’ 보던 나는 또 바틀비를 떠올리게 되었다. 죽음을 맞이한 친구 엘빈을 기념하는 송덕문을 쓰기 위해 그의 생애를 회상하고 찾아가는 토마스를 보다가, 바틀비를 통해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를 연거푸 말하던 작가 허먼 멜빌의 마음이, 그 긴 연보가 자꾸만 겹쳐와 난 혼란스러웠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동안 꾸준히 하던 어떤 것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게 될 때, 나는 이 ‘연보’와 비슷한 것을 떠올렸던 것 같다.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생애를 기념하며 적었던 내 수줍던 글들이 ‘연보’라는 것에 그 의미가 닿아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느 날 무심코  흔적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 대해 탐문한 적이 있다. 이것이 나의 연보가 되겠다 싶어서일까, ‘필경사 바틀비’에서 만난 '연보'라는 단어가 반가웠다.


나는 길다면 긴  인생을 축약해 그날의 심정과 사건을 써 놓았던 메모와 글들을 다시 꺼내어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실패를 발견했다. 삶을 과연 성공과 실패로 판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수많은 실패가 내 삶이 되고 내가 되었다고 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흔들었다.


무엇인가를 크게 그만둘 결심을 할 때 나도 모르게 들었던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무엇’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렴풋하게 그것이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하는 방식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제는 좀 오래된 듯하다. 가수 요조가 ‘실패하는 직업’이라는 산문집을 내고 인터뷰 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누가 봐도 이뤄지지 않을 거 같은 일이고, 결과적으로 실패하더라도 '근사한 과정'을 만드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 과정을 긍정하면, 삶에서도 저를 더 사랑할 수 있죠.", "아마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후회하는 건, 결과보다 과정일 것"이라며, "내가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게 되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가 분명해질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결국 나는 요조의 이 마음처럼 내 생에서 ‘근사한 과정을 만드는 실패’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삶의 파도 속에서 근사한 과정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는 일이 근사한 과정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실패'라고 생각하니, 지난한 삶이 조금 생동감 있어 보이는 것 같아 어딘가 괜찮은 느낌도 들었다.


나는 언젠가 메모해 두었던 웹드라마 ‘무빙’의 대사가 떠올랐. 작전 실패를 걱정하는 두식에게 미현이 작전을 망친 게 처음이 아니라 괜찮다 하자 두식이 했던 말이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면 작전 실패는 잊으세요. 사람이니까요. 의도된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의도된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의도된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는 말을 읊조리자 그 순간 승모근과 어깨가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삶을 살고,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순전히 마음이 하는 일, 마음이 다 하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의도된 실패를 찾는 것이 재미있는 그런 삶이라면, 그 자체로도 근사해 보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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