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포화상태가 되었을 때는 몸을 움직여서 털어낸다. 그중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이 산책이고 달리기였다. 밖에는 언제부터인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 내가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을 볼 수 없기에 보게 되는 진실이 어떤 것인지 미리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조용히 내리는 비 덕분에 우산을 들고 걷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휴우”
나도 모르게 긴 숨이 나왔다. 풍선에서 빠지는 바람과는 다르게 무언가 무거운 것에 짓눌려 빠지는 소리였다.
더러 대부분이 다 그럴 텐데, 유독 근래에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에 치여 있었기에 그랬다. '일은 일로 하자'는 것이 늘 하는 생각이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미성숙한 사람이니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걷는 동안 스치는 이런저런 장면들을 따라 멈출 수 없는 무의식이 가져다주는 상념이 함께 스쳐갔다.
얼마 전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글이 떠올랐다.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에서 했던 말이었다.
자아의 무게라는 것이 뭘까.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이 어쩌면 나 자신일지 모른다는 데에 걸음이 멈춰 섰다.
요즘 읽고 있던 책, <개인주의를 권하다>에서 자아는 자신을 성찰하면서 동시에 그 사실을 언어와 행위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자아라고 했다. 그리고 타인의 인정을 통한 자기 인정, 자기 인정을 바탕으로 한 타인의 인정이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비로소 건강한 개인이 된다고 했다.
불쑥 '굴레'가 떠올랐다. 조금 괜찮아지면 그런대로 또 괜찮아지곤 했다. 반복되는 감정의 굴레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나온 시간에 한정해서 생각하고 있는 내가 느껴졌다.
‘이 정도면, 그만. 이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 이런 마음의 소리가 들리고 나는 또 상념을 이어갔다.
내가 가진 자아, 나라는 사람은 이미 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어떤 때는 그런 나를 피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과연 피하는 상대가 과연 나였을까. 그저 내가 피하고 싶은 것은 '사실', 불편한 그 '사실' 자체였을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내 입을 통해 말이 삐져나왔다.
“잘 못할 수도 있지, 어떻게 모두를 만족시켜. 그게 뭐라고, 별일 아니야. 정말 별거 아니야.”
이럴 때는 내가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되기도 한다.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역시나 마음이 간사해져서는 오롯이 휴일은 휴일대로 가지고 싶은 욕심으로 상황을 합리화하는 내 모습에 묘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아라는 것이 타인에게 보여지는 나의 언어와 행위라면, 내가 느끼는 이 마음의 무게는 외부 세계의 무게에 나의 자아가 맞서는 상황에서 오는 무게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처럼 가벼워지고 싶다면 그 방법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정말 그 속에 답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를 사랑해 주는 방법으로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 돌파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나는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를지 모른다.
나는 다시 질문의 굴레를 돌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인정하고 진실로 사랑하면 개인으로서 온전해지고 건강한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반복해서 읊조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