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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그래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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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용 Oct 27. 2024

필연의 민원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의 여운이 흐르는 채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자신의 언어와 바운더리 안에서의 자연스러운 일이 다른 세상과 부딪히는 순간에 느껴지는 기시감 같은 것이겠지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와 나눈 대화가 생각보다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구나 싶었다.


“네,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네요. 그 부분도 챙겼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확인해서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구구절절 덧붙여 말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었을까? 그는 내게 ‘알아서 잘하시겠지만요’라는 말을 건넸다.


타격이 그다지 느껴지진 않았지만 통화 때 느껴야 했을 당혹스러움은 오히려 그 이후에 찾아왔다. 그가 말한 의견을 검토하고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내가 알게 된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이었다. 대개의 이들이 나를 위로해 줄 정도로 그는 비상식적이고 안하무인이라는 점, 그의 의견은 황당한 수준의 민원이었다는 시선이 그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름의 조치를 하고 나서도 수화기를 통해 느꼈던 헛헛한 마음을 따라 두서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얼마 전에 동료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직접 찾아뵙지는 못하고 부의만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아버지의 임종, 그 과정에서 자식으로서 느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따뜻하지만 슬프고 감사한 편지였다.

그리고 그중에 눈에 들어온 단어가 있었다.


'필연적인'


인간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맞부닥칠 수밖에 없는 생명의 유한함,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알 수 없는 순간에 필연적으로 다가온다는 것, 그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울컥해 답장을 쓰려다가 임시저장을 눌러버렸다.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로빈의 소원’이 떠올려졌다. 루이 소체 치매라는 희귀한 병을 앓다가 생을 스스로 마감한 그의 얘기는 나에게 다소 큰 충격이었다.

이것도 필연적인 죽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필연적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입장이 누구냐에 따라 다를 것이었다.

그보다 난 그 필연적인 순간을 웃으며 받아들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얼마큼의 무게, 깊이, 크기의 '필연'일지는 겪어보지 않아 가늠할 수도 없다. 언제 닥쳐올지 모를 '필연의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싶다'는 것이 조바심을 만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 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까지 들려던 그때, 내게는 어딘지 모를 짠한 마음이 일었다. '필연의 순간'에 평가와 의미는 남겨진 자들의 몫이기도 하지만, 그저 한 번 더 웃을 수 있는 순간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난 '생전장례식'을 상상하기도 했다.


자신이 던진 말이 좌표가 되거나 우연 또는 우발적인 선택으로 지금과는 다르게 살아지는 필연적인 순간도 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어떠한 말과 선택으로 때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여러 번 나아가다 보면 어느 날엔가 안하무인일지도 모를 나의 민원, 나의 소원을 만나게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의 필연의 순간에도 미소 지을 수 있는 '나'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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