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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그래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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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용 Oct 19. 2024

내일 값

'오늘'이라는 내성

"아휴, 징그러."


차 트렁크에 짐을 넣다가 균형을 잃은 가방이 삐끗하자 나도 모르게 고약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응? 아니야, 왜 징그러워. 괜찮아, 다 그래. 내가 도와줄게."


어느새인가 달려온 동생이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고 래퍼가 된 듯이 수선을 떨며 내 손에서 가방을 빼내어 차분히 트렁크 안으로 가방을 밀어 넣었다.


짐을 싣다가 트렁크에 손이 부딪힌 것이 순간 짜증이 나서 한 말이고 별 뜻 없이 한 말이라 난 조금 민망해졌다. 한편으로는 잔소리하는 동생이 귀엽기도 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부모에게 자식이 그렇듯 나에게 동생은 아무리 나이를 먹고 같이 늙어가도 천년만년 동생일 것이라 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얼추 떠날 채비가 끝나고 나는 운전대를 잡았다. 언제나 그렇듯 1시간가량의 운전 시간은 내겐 특별했다. 대개 이 시간은 운전하는 나를 위해 노래를 틀고 부르고 듣는 단순한 패턴을 따라 잡생각과 사색이 넘나들기도 하니 말이다.


나는 기운차게 음원사이트에서 HOT 100을 선택했다. 최근에 느낀 것인데 ‘TOP 100’ 보다는 ‘HOT 100’에 더 관심이 갔다. ‘HOT’이 ‘TOP’ 보다 실시간이라는 느낌에 매력을 느꼈다. 운전할 때는 비트가 있거나 느낌 있는 가사 또는 언젠가 들어봄직한 아는 노래가 제격이라, 그런 기준으로 곡들을 넘기다 보니 새롭지만 어쩐지 익숙한 느낌의 곡, H1-KEY의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라는 노래를 발견했다. 인디(indie) 느낌의 제목이었는데 아이돌 그룹의 노래였다. 비트와 리듬, 가사도 적당하게 빠져들게 만드는 곡이었다. 자신을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에 빗대어 그 존재의 이유와 목적, 가치에 대해 부르짓는 것이 언뜻 듣기에는 가사가 아이돌 느낌이 아니었다. 이제 곧 지천명의 나이에 나는 그것이 묘하게 더 끌렸던 걸까, 듣고 또 들었다. 몇 번을 따라 부르다 보니 익숙해진 리듬에 둠칫둠칫, 그러다 가사를 곱씹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오랜 친구가 떠올랐다. 최신곡 보다는 취향에 맞는 곡, 특히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했던 노래들이 그의 플레이리스트에 빼곡했던 기억이 찾아들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나는 따라 부르던 것도 멈춘 채 어느새 느슨해진 마음으로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다. 


명절 연휴를 보내러 가기 전에 밀린 일들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마음이었다. 그랬던 마음이 명절을 핑계로 할 일들이 며칠 더 미뤄졌음에도 떠나기 전 보다 금세 더 차분해진 기분이었다. 체념은 아니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조금은 의연해진 느낌이었다. 그것은 내일은 내일의 내가 있다고 막무가내로 부려보는 용기랄까, 그것도 용기니까 나름 합리적인 위로이자 격려라고 여기고 있던 것이었다.   


사람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되면 문제의 부피를 줄이거나 쪼개어 해결할 방법을 찾으려 한다. 당연하게도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나에게는 그런 의미로 ‘내일’이 있었다. 어떻게든 결국은 될 것 같은 그런 '내일'이었다. 


‘present’라는 단어가 현재, 그리고 선물이라는 의미라서 종종 '지금'의 가치는 '선물'과도 같다고들 한다. 그러고 보면, '오늘을 붙들어라.',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은 누군가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라는 말도 있다. 불현듯 '내일의 가치'가 떠올랐다.


경마장에서 바깥 시야를 막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정해지고 틀에 박힌 굴레 안에서 경쟁하고 나아가야 하는 그런 내일만을 바라보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마치 보통의 삶이고 안정적이고 안전한 세상이라고 느끼면서 말이다.


오늘을 반복하는 수십년을 경험하다 보면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생각 조차도 어떤 내성이라는 게 생기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정작 엄청나게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오늘 해결되지 않은 일이 내일 해결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어제 쓰다가 못 쓴 글에 또 하나의 생각이 덧붙여지기도 한다고 말이다. 물론 목표를 이루기 위한 어떤 '때'라는 것이 있기는 할 텐데, 이미 겪어버린 '나'만의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수많은 내일을 가지고 있을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동지이자 후배들에게 해야 할 말이 더 어려지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오늘이 될 내일을 가져와 오늘의 나를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가도, 색깔도 모양도 없고, 맛도 느껴지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얼마만큼의 가치일지도 모르는 내일 값을 치러야 하는 오늘의 무게에 어느 '오늘'의 모진 감정이 차올랐다. 내일 값이 오늘의 가치에 비례하거나 등가는 분명 아니었다.


감정이 리듬을 타고 주춤하는 사이, 오늘을 좀 살아본 내 마음속 어딘가 꾹 눌러놨던 내성이 치고 올라왔다.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될 놈은 되고,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말이다.

너는 오늘 할 수 있는 것을 할 만큼 하면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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