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의 질문, 40살의 현실

기다림이 준비가 되는 순간

by 백아람

연초의 설렘이 채 가시기 전에, 올 한 해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고민하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전략을 세우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팀과 방향을 맞추는 이 시간이 매년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유독 작년과 다른 무게감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이제 진짜 시작이다"라는 느낌이 드는 해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책 한 권이 심어놓은 씨앗


23살 때 읽은 책이 있습니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대학생이었던 저에게 그 책은 충격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쓰인 책인데, 토플러는 이런 세계를 예언했습니다. 언젠가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의 경계가 사라질 것이다. 개인이 만드는 것이 경제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때 저는 그 예언이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지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박혔습니다.


"사람이 연결되어 함께 힘을 만드는 구조,
그러면서도 그 힘이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는 구조는 가능한가?"


질문을 들고 다닌 20년


그 질문을 뒤로 하고 첫번째 창업을 했습니다. 25살에 시작한 회사를 10년간 운영하면서, 이 질문과 전혀 다른 일을 하는 회사였음에도 그 질문의 현실 버전들을 계속 목격했습니다. 크리에이터라는 새로운 직업군이 생겨났습니다. 수백만 명이 콘텐츠를 만들고, 그것으로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토플러가 예언한 세계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상한 일이 반복됐습니다. 열심히 만드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이 만든 가치를 온전히 갖지 못하는 상황. 플랫폼이 알고리즘을 바꾸면 하루아침에 수입이 사라지고, 계약은 불투명하고, 수년간 쌓은 이력이 계정 하나에 묶여 있는 현실.


토플러의 예언은 절반만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개인이 생산하는 세계는 왔는데, 그 개인이 자신의 생산물을 온전히 소유하는 인프라는 없었습니다.


쉬운 길이 있었습니다


회사를 퇴사하고 나니 여러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에이전시를 차리거나, 브랜드를 만들거나. 더 빠르게, 더 안전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들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연장처럼 느껴졌습니다. 에이전시는 크리에이터를 활용하는 구조이고, 저는 크리에이터가 주체가 되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더 느린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그 시간이 외롭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다만 방향에 대한 확신만큼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40살, 질문이 현실이 되는 순간


지금 저는 40살입니다. 그리고 올해, 23살의 질문이 현실이 되기 시작하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AI가 등장하면서 크리에이터 한 명이 과거에는 수십 명이 필요했던 일을 혼자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기술이 개인의 편이 되는 시대가 생각보다 빠르게 왔습니다.


토플러가 예언한 것의 표면 - 개인이 생산하는 세계 - 은 이미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심층 - 개인이 자신의 생산물을 온전히 소유하는 인프라 - 이 처음으로 가능해지는 시점에 섰습니다. 20년 전에 심어진 씨앗이 자라는 데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2026년,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올해는 구체적인 것들이 보입니다. 누리라운지 커뮤니티가 어느새 20만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아직 세상에 크게 알리지 않았지만, 3월부터 기업과 크리에이터 모두에게 진짜 의미 있는 서비스를 선보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조용히 설계해온 구조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는 시점입니다.


여름에는 뉴욕에서 새로운 도전도 앞두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이르지만, 우리가 만들어온 것들을 더 넓은 무대에서 증명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작습니다. 그런데 올해만큼은 그 작음이 아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의 크기가 처음으로 우리가 준비한 것과 맞닿는 것 같아서입니다.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올해도 수많은 유혹과 선택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23살의 질문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 구조가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는가. 이 연결이 지속 가능한가.


그 질문이 20년간 나침반이 되어줬습니다. 올해도 그럴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그렇듯, 여기까지 함께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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