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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Y Jun 06. 2022

오늘의 행복

오늘도 무탈하길 기원합니다

아침 일찍 밭으로 나가 오이를 돌아보고 밤사이 발그레해진 토마토를 따고 깻잎 밭 밑에 수북한 잡초를 정리했다. 어제 날이 더워서였는지 흙이 따습다. 까치는 내가 밭에 쪼그리고 앉자마자 혹시 벌레라도 줄까 쫓아다닌다. 집안에 틀어놓은 보사노바가 무화과나무까지 갔을 때는 희미하게 들리더니 감나무 언저리에서는 제법 잘 들린다. 흥얼거리며 떨어진 파란 감을 주어 치운다. 아까워. 


모두 다 출근한 시간, 나를 둘러싼 공간이 나의 행복을 위해 경쟁적으로 충성하고 있다. 이른 아침, 한 여름, 나에게 나누어줄 무언가로 풍성한 텃밭에서 난 행복감으로 쓰러질 지경이다. 그런데 어떤 행복도 입 밖으로 내어 묘사하면 사소해진다. 그 사소함을 입에 머금고 오래오래 음미해야 할 것이다. 


주홍글씨의 작가, 나다니엘 호손은 행복은 나비와 같다고 했다. 다가가려고 하면 도망가지만 당신이 모르는 척 가만히 있으면 아마 당신 주위에 살포시 앉을 것이라고. 행복이 삶의 목표가 되는 순간 행복은 날개를 달고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말일 게다.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복은 찌르찌르와 미찌르가 좇던 파랑새 이후 끝없이 변주되는 주제인 것 같다. 행복 사냥의 먼 길을 돌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주저앉을 때, 행복은 곁에 있었다고 뜬금포를 터뜨리는 게, 말하자면 행복에 관한 인생의 교훈이다, 가까이서 찾아보라는.   


원래 행복은 행운과 어원이 같다고 한다. 계급 이동이 불가능한 전근대의 사회에서 서민들은 기아와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다. 그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겨우 백 년 남짓이다. 하루 세끼 해결이 인생 최대 과제이고 대문 앞이 황천길인 삶을 살다 보면, 그렇지 않은 상태, 배불리 먹고 신체적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행운에 가까웠을 것이다. 


21세기, 물질적 안정을 어느 정도 누리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이제 행복은 당위적 과제가 되었다, 도망가던가 말던가 단단해 틀어쥐고 이루어 내야 하는 그 무엇. 따라서 성공한 인생이라면 행복은 필요조건이다. 최근 들어, 좋은  대학을 나오고, 사회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꼭대기에 안착하는 한편, 사이드로 건물 하나쯤은 가져야 한다는, 다소 개발시대적인 수량적 성공의 지표는 인생의 질을 포괄하는 행복으로 옮겨간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행복마저도 수량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듯하다. 고급스러운 여행, 미슐랭 가이드 식당, 뮤지컬 관람 인증샷의 수, 인스타그램에서 받은 좋아요의 수, 페이스 북에 댓글 달아주는 친구들의 수 등등. 성공의 얼굴만 달라졌을 뿐, 그 내용은 어찌 보면 똑같다. 진부한 성공 스토리에 행복을 덧씌었을 뿐. 고메 식당에서 찰칵, 하이델베르크 찰스 브리지 앞에서 찰칵, 몰디브에서 모히토를 든 날씬한 비키니 몸매를 찰칵, 디자이너 브랜드 옷에 환히 웃는 얼굴은 당연히 찰칵, 그 순간을 함께하는 친구들의 파안대소도 찰칵찰칵. 사회관계망 서비스는 행복한 순간을 유통하는 이 꿈의 허브이다. 이 활발한 꿈의 현장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적금을 들고, 항우울제를 먹어가며 행복한 셀피를 올린다. 환한 웃음에 감금된 행복을 유통하고 자신의 가치를 그 흐름 속에서 측정하는 것, 요즘 말로 정말 의미 없다, 의미 없어. 현대인의 우울과 불안을 SNS에서 찾는 주장이 힘을 받는 지점이다. SNS에서 캡처된 행복은 찰나다. 찰나의 행복은 지속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추구할 때, 그건 행복이 아니라 감정적 중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한 행복의 정의가 묵직하다. 그는 무탈한 오늘이 행복이라 말한다. 어떤 흥분된 일이 생기지 않아도, 기대하지 않던 행운이 굴러들어 오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이 소소히 지나가는 하루가 행복이라는 그 말, 간만에 건진 금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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