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스페인 여행이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로 몰릴 때 우리는 두 도시를 후딱 끝내고 스페인 남부로 향했다. 스페인 남부는 그 나름의 헐거운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웠다. 문화재 같은 고성은 아무데서나 뚝 끊어져 있었고 설명도 없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때는 이십여 년 전이라 여행자를 유혹하는 상점도 드물었고 스페인 말 말고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조잘거리는 어린것들을 태우고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를 떠나 스펜인 남부, 안달루시아에 도착했다.
스페인 남부는 오후 세시 같은 장소다,
더 달릴 필요가 없는 하루를 내려놓을 쉼터 같은 곳.
있는 곳에 주저앉아 과거와 현재가 오가는 시간을 느껴 볼 수 있는 곳.
코르도바, 세비야를 거쳐 마드리드로 돌아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그라나다에 들렀다. 여행 가이드가 알함브라 궁전에 도착했다면서 살구빛 도는 핑크색의 거대한 돌 건물을 가리켰다. 여태까지 여행했던 장소 중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 일 순위를 꼽으라면 나는 알함브라 궁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훼손에 대한 우려 때문에 여러 가지 금지사항이 많다지만 그 당시는 방문객도 별로 없었고 입장표가 있었는지도 생각안 날 정도로 궁전 안을 내 마음대로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가던 날이 더웠던지 돌로 만든 가제보에 네 식구가 눕기도 했다.
유목민으로 떠돌던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해서 유목민의 정서를 담아 지은 궁전이 알함브라이다. 궁전 안 뜰은 썰렁할 정도로 장식이 없었다. 화려한 정원도 없었다. 아름다운 아라비아 글자로 부감 장식한 벽, 세월에 닳은 바닥벽돌, 평범한 우물이나 연못이 다 였다. 조용한 궁의 안뜰에서 우리 가족의 샌들이 토닥토닥 바닥 돌을 때리던, 그 평화로운 오후를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은 돌 궁전에서 메아리로 돌아오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재밌어했다. 어렸을 때, TV '화면조정 시간'에 나오던 '알함브라 궁전'의 기타 연주가 저절로 흥얼거려졌다.
궁전의 장식의 결핍은 충격적이었다. 유럽 본토의 화려한 장식의 교회나 궁전에 기가 질릴 정도로 압도당했던 나로서는 아무것도 없는 게 그렇게 아름다운지 그제야 알았다. 화려한 미술과 조각, 대단한 건축 기법을 이용해 지은 궁전을 보다가 알함브라를 보는 건 스테이크 먹은 다음 동치미 국수 먹는 기분이었다. 결핍의 아름다움은 잃을 게 없는 고결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세월과 풍상에도 꼿꼿한 비석 같은 것. 풀이 자라서 상판을 덮어버려도 그 위로 얼굴을 비쭉 내밀고 그곳에 누운 사람의 생몰을 일려 주는 비석처럼 시간을 경호하고 있는 알함브라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이유다.
몇 세기 동안 버려졌던 알함브라 궁전엔 노숙자들이 살았다 한다. 어느 정도의 훼손은 있었겠으나 정말 표가 날 정도의 훼손이 있었을까 싶다. 그러나 그게 베르사이유 궁전이라면 달랐을 것이다. 한껏 멋 부린 난간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고, 거울의 방은 박살이 났겠지. 수수한 장식을 거느리고 흙과 돌이 가지런히 박힌 궁전의 뜰을 걸으며 날개옷을 입고 그곳을 거닐었을 북아프리리카의 공주와 이국의 노예와 쥐나 듣는 밤말을 끝없이 양산해내는 모략과 중상이 드라마처럼 귓가에서 속삭거렸다. 슬리퍼를 신은 아이들이 돌 궁전을 파닥파닥 뛰어다니고, 무어족과 이베리아 혼혈의 미녀가 같은 계단을 긴 다리로 날아오르 듯 뛰어 올라가는 오후.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다 슬프다.
Memories of Alhambra - Francisco Tárrega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