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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Y Jun 10. 2022

마지막 인사

할머니는 회갑을 맞아 절에서 잔치를 원하셨다. 평교사였던 우리 부모에게는 버거웠을 텐데도, 그때 왔던 많은 손님들과 할머니 앞에 레고처럼 쌓여 있었던 유과, 사탕, 과일 등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회갑연을 끝낸 할머니가 다음으로 원한 것은 최고급 한산모시 수의였다. 난 혼란스러웠다. 화려한 잔치를 열어 자손과 친척들에게 만수무강 소리를 족히 백번은 넘게 듣고 흡족해했던 할머니가 입고 죽을 수의를 원하다니... 할머니 사랑이 남달랐던 나는 할머니의 죽음이 지레 생각 키워져 슬퍼졌었다. 의문은 나중 싱겁게 풀렸다. 수의를 일찍 장만해 놓으면 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일관되게 오래 살고 싶으셨던 거다. 그 이후 20여 년을 더 사셨으니 수의가 그 값을 어느 정도는 했다고 해야 할지. 


어떤 죽음을 맞을 것인가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와 맞닿아 있음에 틀림없다. ‘어떻게 살래?’라는 질문에 ‘부자가 될 거예요’처럼 ‘어떻게 죽을래?’라는 질문에 ‘9988234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죽고 싶다)’ 역시 현문에 우답일 뿐이다.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 삶에 대한 태도, 자신을 삶 가운데 위치하는 방식이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람들과 이별하는 방식, 죽음에 대한 태도가 한 사람이 죽음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어느 시사평론가의 베스트셀러도 ‘어떻게 살 것이가’라는 제목에서 시작해서 ‘현명하게 지구를 떠나는 방법’이라는 소제목의 에필로그로 끝을 맺고 있다. 같은 말이라는 뜻이다. 오늘 나의 사는 모습이, 오늘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마지막 날을 대하는 내 모습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몇 년 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평소 조용하시고 원하는 게 없는 분이셨다. 뭐든지 좋다 하시고 불평하거나 싫은 소리를 하시는 걸 들은 기억이 없다. 정말 돌아가실 때도 그 모습 그대로 이셨다. 한 달 정도 아프시고 마지막 2주는 누워만 계셨는데, 그 와중에 어머니 약은 어디서 사는 것이 좋은지 (어머니는 약을 여러 가지를 드시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시아버지가 챙기셨다) 등을 꼼꼼하게 아들들한테 남기셨다. 모든 자손들이 오기를 기다리시기나 한 것처럼 속속 도착한 후에 돌아가셨는데, 그 기간을 뼈만 남은 야윈 모습으로 장군같이 버티셨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증손자 증손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셨고 말씀하실 수 있을 때까지 자녀들에게 ‘고맙고 수고했다’라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착한 아들들에게 남긴 유언 같은 말은 ‘너희 어머니 정말 사랑했다’였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아버님 서재 컴퓨터 밑에 언더 테이블을 당겨보니 성경책과 내가 거의 10년 전에 쓴 책이 나란히 있었다. 신발만 남기고 죽은 성자같이 아버님은 우리 각자가 기억할 사랑만 남기고 떠나셨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가끔 죽음을 생각한다. 태어남을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죽음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의지 밖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삶의 자세는 각자의 의지 안쪽의 일이다. 생각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그날이 꼭 평균 연령 언저리에 생길 것이라는 통계의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어떤 사람은 100 살에 죽고 다른 사람은 60살에 죽는다면 평균 기대수명은 80년이고, 편차는 40년이나 된다. 누구에게 100년의 수명이, 또는 60년의 수명이 주어졌는지 알 수 없다. 

2.       따라서 움직이는 과녁을 잡으려고 애쓰지 말고 지금 나의 모습이 그날에 닿아 있을 거라 여기는 게 맞다. 그날은 먼 미래에 갑자기 뛰어드는 불운이 아니라 여러 번의 오늘이 반복된 후에 맞는 또 다른 하루일 것이다. 

3.       그렇기에 오늘 하루가, 한나절이 우리에겐 마지막 삶의 조각이 될 수 있다. 

4.       어떤 철학자가 오늘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장렬한 말로 그 이후 태어난 세대의 마지막 날을 정의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무거나 해도 되는 날이 그런 날이다. 사과나무를 심으면 어떻고, 빨래를 하면 어떻겠나. 곡괭이 빨랫감 다 집어던지고 자신을 위해 울면 왜 안 되겠는가.

 

나의 마지막 인사를 생각해 본다. 모든 이별은 슬프다. 나를 보내는 다른 사람의 슬픔에 공감이 된다면 더 슬플 것 같다. 그럼에도 시인 천상병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즐거운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가벼움, 즐거움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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