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음식
곁에 있어도 그리운 연인을 따라 호주로 건너온 지 30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한다.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말이다. 자주 보지 못하면 애틋한 마음도 그 만큼 무뎌지는 건 맞다. 부모 자식간 관계도 그러해서 민망한데, 그 민망함을 달래주는 말이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가끔 서울을 방문하고 의례적인 안부를 물으며 한밤 중에 받아야 할 뜻밖의 전화가 없으면 잘 지내시려니 한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허룩해진 부모님과의 관계가 쳇기처럼 걸려있다. 그런데 중년에 들고 보니, 사무치는 절절함이 없음에도, 부모의 삶은 내 존재에 드리운 채,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음이 보인다.
그 중에 하나가 음식이다. 아버지는 개성사람이다. 외아들을 동앗줄처럼 잡고, 전쟁과 홀어미의 고단한 삶을 견뎠던 할머니는 음식 장인이셨다. 개성음식이 본래 화려하고 유명하다고 듣긴 했지만, 우리 할머니의 음식은 주위 사람들이 ‘잘하는 음식’의 기준으로 삼을 만큼 훌륭했다. 장독마다 담긴 다양한 장류와 젖갈, 계절을 달리하는 김치와 만두, 여러가지 떡들을, 나는 물론이고 엄마나 고모 모두 배우지 못했다. 이제 음식에 관심을 갖다보니 할머니의 음식을 아무도 전수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편모슬하 외아들 콤플렉스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를 편치 못하게 했고 엄마와 할머니의 고부갈등도 만만치 않았다. 언젠가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들 처럼 순하셨다면 내가 어머니를 업고 다녔을 텐데…” 회한에 젖어 하시는 혼잣말을 들었다.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우리 아버지가 좀 살갑고 편안하시면 내가 좀 더 자주 연락드릴텐데…” 나는 이 안타까운 세대유전을 내 대에서 끊을 자신이 없다. 벌써 내 아이들의 혼잣말이 들리기 때문이다.
하옇튼 그 많은 개성의 향토 음식 중에 적응 안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장땡이다. 햇된장에 수수와 찹쌀 가루를 섞어서 다진 고기와 갖은 양념에 버무려 찌고 말리고를 반복하는 음식이다. 그 수고에 비해 만들어진 음식은 좀 엽기적이다. 할머니가 도시락에 장땡이를 넣어주신 적이 있었는데, 남동생 친구들이 장땡이를 보고 똥이냐구 묻는 바람에 남동생이 다시는 도시락에 장땡이 싸주지 말라고 심술부린 일이 생각난다. 그 직관적 낙인은 반론의 여지가 없으며, 인터넷을 찾아보면 개성장떡이라는 다소 고급진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보다는 장땡이가 더 잘 어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번 서울에 계신 부모님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는 갑자기 장땡이에 대한 얘기를 꺼내셨다. “시원하게 장맛비 쏱아지는 점심 때, 숯불에 구운 장땡이 조각하나면 그날은 왕후장상 밥상이 안부러워. 찬밥에 더운 물 말아 크게 뜨고, 짜디짠 장땡이 한 조각을 물밥 위에 딱 얹어 오물오물 씹다가 목으로 넘기면, 까무러쳐.” 감탄을 표현하는 아버지의 과장화법이지만, 장땡이라는 음식의 그리움이 내게도 전달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27년, 그 세월 동안 맛보지 못한 장땡이의 맛을 말로 맛보시는 듯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맛을 다시면서.
효녀는 아니지만, 음식호기심이 많은 나로서는 그까짓거 못만들어 드릴 이유가 없다. 인터넷을 뒤져 내가 기억하는 맛과 가장 비슷한 레시피를 뽑아들고 장땡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수가루는 없어서 건너뛰고, 모든 재료를 섞어 장땡이를 빚었다. 저장성과 탄력을 높이기위해 장땡이는 세번 이상 찌고 말리고를 반복해야 한다. 친정에는 건조기가 없는데 마침 날도 덥고 습기가 눅진할 때라 헤어드라이어를 써서 나흘만에 장땡이를 완성했다. 냉동시설이 없었을 때는 한없이 짜게 해 더운 날씨도 견디게 했지만, 냉동고에 보관하고 먹으면 되니 덜 짜게 하려고 노력했다. 딱딱하게 마른 장땡이를 기름에 구워 잘게 잘라 드렸다. 아버지는 ‘장땡이 먹는 법’에서 설명했던 대로, 물말은 밥에 장땡이 한조각씩을 얹어 수행하 듯 말없이 드셨다. “비슷하다.근데 더 짜야 해.’ 아버지의 입맛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이었다.
호주로 돌아와서 인편을 통해 한국에 장땡이를 보낼 기회가 생겼다. 호주 일조량은 장땡이 말리기 딱 좋은 날씨인데다가, 뒷마당 텃밭에서, 이것저것 기르는 나는 한국에서 기본에 의지했던 장땡이 대신 21세기의 상상력을 입은, 아버지를 까무러치게 할 유기농 장땡이를 만들기로 했다. 역시 수수가루는 없다. 패스. 찹쌀을 쪄서 말려서 분쇄기로 갈았다. 지난 번은 다진 고기를 사서 했지만, 이번에는 쇠고기 안심을 사서 곱게 다졌다. 뒷마당에서 철이른 더덕을 캐고 가장 실한 대파와 우윳빛 영롱한 마늘을 챙겼다. 이번 장땡이의 하이라이트는 직접 담근 작두 된장이었다. 작두콩이 풍작이 들어 메주콩 대신 작두를 삶아서 된장을 만들어 놓은 터였다. 나쁘지 않은 맛이다. 모든 재료를 섞어 찌고, 강렬한 호주 햇볕에 말리는 과정을 반복한 후, 잘 포장해 한국에 보냈다.
아버지의 평을 들을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 장땡이 맛 어땠어요?” “음… 지난 번 거이 더 나아.” 역시 우리 아버지 변함이 없으시다. 디테일에 쏱았던 모든 노력이 공중으로 흩어짐을 느끼며, “알았어. 다음엔 기본으로 만들어 보낼게. 이것저것 보태느라 애쓰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고맙다 우리 큰 딸. 네 살림도 바쁠텐데, 이렇게 고급으로 만들어 보내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니?’는 물론 내가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우리 친정엔 그런 드라마가가 없다, 오직 다큐만 있을 뿐이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의미 백프로 장전한 직진의 대화가 우리 친정 가족의 대화다. 객관적 현실을 파악에는 도움이 되지만, “잘먹었다. 수고했어.” 같은 너무 많이 나누어 고마움의 표시라기 보다는 의미없는 의례가 된 그런 대화의 중요성을 우리는 많이 잊은 것 같다.
저녁에 오랜만에 한국 음식프로그램을 봤다. 유명 쉐프들이 나와서 귀한 식재료로 화려한 우동과 김밥을 만들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은 물론,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그 흔한 우동과 김밥을 흔치않은 우동과 김밥으로 재탄생시켰다. 그 먹음직한 음식을 보며 내가 떠올린 건, 36년 전 기차역에서 먹었던 우동과 김밥이다. 찌그러진 냄비에 담겨 유부와 파가 동동 떠다니던 유부 우동과, 누런 플라스틱 접시에 담겼던 속이 없어 빈약한 김밥. 그날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 없이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던 참이었는데, 역전앞 우동은 여행 통해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같은 음식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아빠없이 기차를 타고 낯선 민박집에서 묵을 터였다. 2박3일동안 우리끼리 계획을 짜고, 빠듯한 용돈의 한도 내에서 장을 보고 밥을 해먹을 것이다. 여고생 티를 벗지도 않은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즐거워 조잘대었지만 한 오 백여가지의 조심해야할 주의 사항 (거의 잔소리)을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들었던 우리에게 그 김밥과 유부우동은 그런 첫 행보의 긴장을 풀어주는 음식이었다. 비록 조미료 맛이었겠지만, 그 풍미와 든든함을 잊을 수 없다. 남편에게 묻는 듯 했지만, 난 혼자 중얼거렸다. “왜 요샌 깔끔한 맛의 유부우동이없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맥락없는 그리움은 없다. 장땡이에 대한 그리움은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웠던 그 때, 따뜻했던 엄마, 사업수완 좋은 아버지로 인해 풍요로웠던 고향 살림, 무엇보다도 기둥처럼 튼튼했던 두 다리를 가진 젊음 등, 디테일이 살아있는 하나의 셑트장과 함께 묶여 도착해야 했다. 장땡이는 눈 앞에 있지만, 그 눈부신 셑트장이 미쳐 따라오지 못할 때, 장땡이는 옛날 그 맛이 아니다. 서울 어느 변두리에 개성식당이 개업했다는 얘길 듣고 엄마와 아버지는 전철을 타고 그 식당을 다녀왔다 했다. 역시 옛날 그 맛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생일에만 특별히 준비하는 조청을 부은 색색깔 경단을 따뜻하게 데울 아랫목이 없고, 있는 대로 둘러앉아 나뭇칼로 자국을 내며 조랭이 떡을 만들던 식구들이 없다. 고추가루 범벅인 다른 지방 김치와 달리, 분홍빛 맑은 국에 담긴 하얀 속살같은 아삭한 보쌈김치를 죽죽 찢어주시던 어머니가 없다. 그 부재의 맛은 아버지가 어릴 때 누렸던 음식 호사 때문이 아닐 것이다. 부재로써 가장 강렬한 존재를 알리는 고향의 맛, 젊음의 맛이 아닐까.
엄마가 어느날 전화를 했다. 내가 보낸 장땡이를 다 떨어져서 엄마가 직접 만들려고 하는데, 어떻게 만드는지 그 방법을 물었다. “엄마 염려마. 내가 출장같다와서 부지런히 만들어 곧 보낼게.” 호기롭게 장담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든 해외 여행과 우편이 취소되었다. 할 수 없이 엄마에게 카톡으로 장땡이 만드는 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잘 되었는지, 아버지가 즐겨 드시고 계신단다. 솜씨 좋은 엄마가 잘 만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제는 고향과 젊음의 맛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장땡이의 건강한 식감과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짭짤한 담백함을 새로이 발견하고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이제 아버지의 인생음식, 장땡이를 힘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다. 아버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나도 먹고 싶은 음식이 되었다. 개성에 가 본 적도 없고 아버지의 회한의 깊이도 모르는 나이지만 장땡이의 맛이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호주에서 태어난 우리 딸이 시커멓고 똥같이 생겼지만,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까지 불러모으는 이 음식을 만들고 즐기게 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어느날 우리 손녀가 지 에미가 해준 장땡이를 먹으면서, 맛있다고 숟가락을 또 내밀면, 아이는 보지도 못한 우리 할머니의 고단한 삶과,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낯선 나라에 와서 뿌리를 내린 나의 반전 인생이 고스란히 얹혀져 그 아이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린 그렇게 소멸을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