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휴식을 허하라
코로나 전, 곧 팔순을 맞을 엄마가 척추가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랴부랴 비행기 표를 사서 한국에 도착했는데, 추석 연휴 때라 간병인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나 밖에 간병할 사람이 없었다. 간병인의 생활은 의외로 단순했다. 오전 열 시쯤에 병원을 나와 집으로 가서 아버지 식사를 챙기고 빨래나 집안일을 했다. 그리고 오후 두시쯤 다시 병원으로 향해 엄마를 간병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너비가 50센티 정도 되는 간병인 침대에 누워 할머니들의 아이고 아이고 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밤새 뒤척였다. 겨우 3주였는데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잠을 못 자니 아픈 엄마에게도 절로 짜증이 났다. 긴 병에 효자 없는 정도가 아니다. 환자의 투병과 가족의 끝이 안 보이는 간병 중 맞는 비극을 가끔 신문에서 접한다. 인구 고령화 시대에 노인복지 시스템이 더욱 자리 잡으려면 간병의 짐은 사회가 나누어져야 할 것이다. 현대 한국의 사화 환경이나 경제적 구조 속에서 자녀가 부모의 간병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자녀세대만 힘들다고 할 수는 없다. 병실에 옹기종기 모인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부모를 모신 마지막 세대가 될 거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한다. ‘효’는 곧 죽은 말이 되어 관에 꽝꽝 못 박힐 것처럼 말한다. 이쯤에서 시어머니 병수발 20년, 꼬마 시동생 키워 장가보낸 얘기 다 쏟아져 나온다. 어쩌면 모두 그리 한결같이 고된 삶을 살아왔는지 짠한 마음이 든다. 자신은 젊음을 부었는데, 돌아온 대가는 찬밥 수준이라고 많이들 속상해한다. 급기야는 간병하는 딸들은 넘치는데 봐라 여기 며느리들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한숨 섞인 탄식을 내어놓는다. 이 장면에서 한 마디 안 할 수 없다. 저기요... 이 딸들이 그 며느리들이거든요. 기어이 양쪽 집 다 간병하다 쓰러져 효부문 받으시려는 건지, 딸도 며느리도 다 나만 간병해야 한다 하시는 건지 입장 분명히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오래 입원해 있는 노인들의 딸들은 갈등이 많았다. 그들도 가정이 있고, 직업이 있는데 다른 형제들은 인사치레만 할 뿐, 으레 늙은 부모를 간병하는 건 한 자녀 – 주로 딸 – 에게 집중되어 있다. 혼자 이 짐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가버렸다가도 하루 이틀 지나면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붙박이가 되는 딸들이 적지 않았다. 엄마가 3주 입원해 있는 동안 간병인 딸들을 위한 노조를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간병인도 쉬는 연휴, 딸들에게도 허하라’ 피켓팅 한 번 하게. 힘들면서도 심심하다 보니 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베이비 붐 세대 (Baby boomers)가 끝나고 다음 세대는 X, Y, Z로 계보를 잇고 있다. 대학교를 다닐 무렵에 신세대란 말이 유행했는데 – 정말 이상한 용어이기는 하다. 어느 시대든 젊은 세대는 신세대인데 – 우리 나이 또래를 통틀어 X 세대로 불렀다. 원시부족의 동굴 벽에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말 – 사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음모론일 수 있다 – 이 새겨진 이후로 당대의 신세대는 좋은 말을 듣는 일이 별로 없다. 당연히 개인주의적인 X세대, 싹수없는 신세대 등, 싸잡아 부를 수 있는 모든 말이 난무했던 걸 기억한다. 장유유서와 남아선호 사상의 프레임이 유효했던 시절을 산 기성세대에게 X 세대는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X 세대는 나중 386 세대로 정치적 함의를 담게 되었다.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쳤고, 가족을 해체하고 윤리도덕을 땅에 떨어뜨리고야 말 것이라는 악담을 들으면서도 호주제 폐지에 앞장섰던, 개인주의자 혹은 싸가지로 보였던 그 X세대도, 결국은 병원에서 간병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환자 보호자가 되어, 돌아온 누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엄마가 퇴원할 무렵 휠체어에 앉아 있는 파파 할머니와 그 휠체어를 밀고 있는 다른 할머니를 보았다. 모녀인 듯 보였다. 휠체어를 미는 할머니는 나의 가까운 미래이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그보다는 좀 더 먼 나의 미래일 수 있다. 오래된 미래... 아프지만 세대가 삶을 유지하며 유전하는 방법일 게다. 갑자기 삶이 처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