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 사용에 관하여
외국에 오래 살면 저절로 옛날 사람이 된다. 특히 사회적, 지적 활동이 활발했을 때 한국을 떠나면 떠난 시기의 사회적 가치관이나 태도가 고정될 뿐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이나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20대에 한국을 떠난 나도 어느 면에서는 8,90년대 사람일 것이다. 한국 갈 때마다 제일 불편한 건 옳게 쓰이지 않는 존댓말을 듣는 것이다. 커피숍에서 화장실을 물어보면 너무나 친절하게 “네 고객님, 저쪽으로 가시면요, 코너에 화장실이 있으세요.” 한다. ‘님’이라는 접미사가 고객 뒤에 붙는 게 맞는가 곰곰 생각하며 저기에 ‘있으신’ 화장실로 간다. 또 백화점에라도 가면 “이 상품은 가격이 오르셨어요. 그래도 지금 세일 기간이라 가격 할인이 되세요”라며 예쁜 웃음을 짓는다. 나 같은 소비자 나부랭이는 깎아준다니 감읍할 밖에. 카페나 식당에서도 주문할라 치면, 이게 맛있으세요, 저게 맛있으세요 두 손으로 꼭꼭 짚으며 안내한다. 그렇다면 나도 공손하게 그 귀하신 커피를 시킬 수밖에. 시키고 돌아서서 조금만 기다리면,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엎드려 받아야 하나 또 공손해지는 순간이다. 사물에 존대를 하는 건 8, 90년대는 없던 일이었다. 젊은이들이 갑자기 공손해졌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교육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언어의 습관이 단 1, 20년의 교육으로 바뀔 수는 없다.
의외로 답은 간단하게 얻을 수 있었다. 모든 것에 존대를 붙이는 이 현상은 다름 아닌 갑질의 부작용이었다. 연전에 나와 똑같은 궁금증을 가진 한 기자가 왜 서비스 종사자들이 과도하게 존대를 사용하는지 취재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사물 존칭을 쓰는 그들도 문제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존대를 잘하지 않으면 고객들이 클레임을 걸거나 그들에게 욕설을 듣는 게 다반사라 일단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 데나 존대를 붙여서 소비자를 응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진상 손님이 등장할지 모르니까. 이렇게 언어의 바르지 못한 쓰임새가 미디어와 삶의 현장에서 반복되다 보니, 화장실에 존대를 해도 커피에 존칭을 붙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상한 것은 또 있다.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젊은 가수들이 선배에 대해 얘기하면서 “아무개가 어찌어찌하셔서 제가 정말 감사했는데, 그분은 누구한테나 그렇게 친절하시더라고요.” 그분이 열여덟 살인 걸 알면, 오십 넘은 나는 상당히 불편하다. 한국어는 존댓말과 존칭이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는데, 그 복잡함에 한 단계 더 복잡함을 더한 것이 압존법이다. 즉, 존대를 하되, 윗사람에게 말할 때 그 보다 어린 사람은 존대를 하지 않는다. 요즘은 압존법이 많이 무시되고, 듣는 사람의 나이를 막론하고 윗사람을 말할 때 높이는 경우가 많지만, 열여덟 살 젊은이를 계속 그분이라 지칭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은 엄청 불편하다. 아마 빠른 99, 늦은 99하며 나이를 달 단위로 쪼개는 청소년들에게는 한 살 많은 것도 큰 차이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적절히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어른이 주위에 없다는 건 좀 의아하다. 아니면 기획사라던지, 그들의 세계에서 ‘선배는 하늘’이라고 가르치고 있을지도.
꼰대 짓 한 번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