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와 만난 ... 삶과 죽음
비엔나는 도착하기 전부터 설레었다.
세기말적 우울이 마치 낭만인 양 흐르던 곳,
20세기를 연 사상가들이 머물거나 지나간, 신비한 샹그릴라 같은 곳,
무엇보다도 황금의 화가, 클림트가 빛내고 있는 도시.
그래서 인지, 클림트의 ‘키스’를 보기 전까지는 비엔나를 떠나지 말라는 말도 있다.
그러니 키스는 봐야 했다. 벨베데레 궁전, 다소 산만한 전시실 한가운데 황금빛 '키스'가 걸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 하는 대로 ‘키스’ 앞에 줄 서서 사진을 찍으며 내 마음은 이미 20세기 초반 비엔나를 걷고 있었다, 우디 알렌의 영화, Midnight in Paris처럼. 담배연기 속에서도 선명할 여자들의 빨간 입술, 게으르게 반쯤 감긴 연인들의 눈, 그럼에도 뜨거웠을 토론과 새벽의 굿 나이트 키스를 상상했다. 영화 ‘색계’에 나오는 탕웨이의 삐뚤어진 초록색 모자와 고급스러운 커피숍과 급기야는 그녀의 겨드랑이 털,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섹스씬까지. 클림트의 키스 앞에서 동서양의 20세기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근대를 열며 희망을 닫아버린 듯한 세기말적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를 화려함과 열정으로 살아낸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라면 동경이랄까 어떤 호기심이 있는 것 같다. 그리로 들어가는 웜홀이 있다면 기어들어가 그 시간을 경험하고 싶다. 나도 옛날 사람이 되어가는 중에 더 옛날을 그리워하는 건 무슨 심리인지 궁금하다. 이 얘기를 하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언젠가 어떤 아이에게, '아줌마 어렸을 때도 엘리베이터 있었어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서 ‘아니 없었어. 그래도 그때 마침 자동차가 생긴 때라 마차 타다가 자동차를 탈 수 있었지….’라고 댓구했다. 정말 놀라웠던 건 아이가 그걸 또 믿는 눈치다. 상식이 없는 아이를 탓해야지 내가 거울을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엔나에서 이틀째, 레오폴드 미술관을 찾아 클림트의 '죽음과 삶'이라는 그림을 마주했다. 오른쪽엔 살아있는 몸들이 움직이고 있다. 사랑을 끝낸 듯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연인들, 무중력 가운데 던져진 것 같은 아기의 포동포동한 몸, 수유에 지쳐 잠들어있는 엄마의 평화로운 얼굴, 그 사이 늙은 여인의 얼굴 등. 반면 왼쪽엔 죽음이 서있다. 죽음은 혼자다. 옷 입은 해골 하나 덜렁. 사실 그렇다. 해골은 그저 한 가지 표정을 하고 있을 뿐, 나이도 성별도 삶의 역사도 보이지 않는다. 해골의 구멍을 통해 보이는 죽음의 깊이는 이미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죽음은 어두운 색깔과 십자가로 장식되어 있지만, 삶은 칼라풀하다. 꽃이 피어나 생명을 꾸미고 있다. 죽음과 삶 사이에 요단강처럼 검은 강물이 흐르는데, 삶은 죽음을 외면하는 한편, 죽음은 삶을 응시하고 있다. 정확히 Memento Mori의 형상화다: 죽음을 기억하라. 난 이 말이 중세에 쓰였다고 해서 사람을 겁박하거나 경고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오히려 너의 삶의 소중함을 기억하라는 말 일 것이다. 누구도 조화를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하지 않는다. 오백 년은 족히 유지될 그 아름다움엔 아쉬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향기와 함께 하얗게 피어나는 목련에 감탄하는 이유는 이틀도 못 가는 그 짧은 생명의 시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도 찍고, 일부러 냄새도 맡아보고, 한 번 더 들여다 보고, 식구대로 다 불러 똑같은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다. 보듬고, 냄새 맡고, 어루만지라고...
결국 삶은 내포된 죽음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말은 맞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상을 살면서 죽음을 기억할까. 한편으로는 늘 그렇게 산다면 참 피곤할 것 같기도 하다. 정신이 쉴 틈 없이 순간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야 한다는 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오십이 넘고 보니 이것저것 성가신 일이 많아지긴 했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기보다는 죽은 척하고 사는 일이 많아졌다.
키스 앞에서, 사랑의 희열에 들뜬 연인들의 작은 죽음을 목격한다. 우린 사랑할 때도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