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의 힘 <미각>편

움직이는 것에는 힘이 있다 4부작

by 이런아란

결실의 계절답다. 지역구 문화센터부터 동네 어린이집까지 한해 동안 배우고 익힌 것을 펼쳐 보이는 잔치가 풍성하다. 각종 발표회마다 앰프를 비롯한 음향장비가 동원된다. 전문 공연단의 식전행사건 아마추어의 서툰 무대건 앰프 스피커에서 퍼져 나온 음악이 장내를 뒤흔드니 공연이 더욱 웅장하게 여겨진다. 다분히 소리가 커진 이유도 있지만, 스피커 안에 내장된 진공관이 전류를 확장시키며 발생하는 진동이 듣는 이의 가슴까지 뛰게 하기 때문이리라.


심장 박동보다 빠른 비트 음악에 맞춰 단단한 팔다리가 바람을 가르며 무대를 쿵쿵 굴러댄 아이들의 태권도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화려한 군무와 퍼포먼스가 가히 압권이었지만 현장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아니었다면 감동은 절반이었을 것이다. 달뜬 얼굴로 박수를 멈추지 않는 관중석을 바라보며 나는 떨림, 즉 움직이는 것의 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사로잡고, 감동을 주고,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울림들이 있다. 시각적으로든 미각적으로든 모든 오감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움직이는 자극'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움직이는 것에 끌리고 움직이는 것에 집중한다. 멈춘 것을 응시할 때조차도 그것이 별안간 파동할 순간을 상상하며 짜릿해한다. 평면에 박힌 글자를 붙잡고 늘어진 글쟁이 처지에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움직임이 사람을 이끌고 위로하는지, 나는 '맛'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처지 개선에 도움이 될까 해서다.


지난 주말 우리 부부가 씻고 나갈 기력도 없어 택한 메뉴는 낙지볶음이었다. 종일 자다 깨다 한 남편이 맵게 해달라는 당부를 곁들여 배달을 주문했다. 깊은 팬에다 자글자글 볶으면서부터 땀을 뺀 우리는 새빨간 국물과 덜 익힌 파, 맵싸한 부추 겉절이까지 싹 비웠다. 입맛이 없더니, 의욕마저 없더니 한 그릇 먹고 나자 누구라도 싸워 이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들뜬 마음에 아이랑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먹고 축구도 여러 판 했다. 아빠가 쉽게 져주질 않아 아이 속이 쓰렸을 거고, 우리도 사실 새벽녘에 속이 쓰리긴 했다.


위장이야 어찌되었건 과연 얼큰함은 삶의 의욕을 북돋는 맛이었다. 말간 콩나물국이나 뽀얀 칼국수에도 고추 후추 넣어 먹는 우리다. 다진 마늘과 쫑쫑 썬 청양고추까지 더해야 풍미가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땀 흘려가며 뜨겁고도 매운 국물을 그릇째 들이키고는 시원하다, 속이 다 풀린다, 스트레스가 날아간다 한다. 해도 해도 안 되는 것 투성인 시절을 살아내는 젊은이들이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맛보고자 더욱 더 매운 음식을 찾는 것도 이해될 만하다.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캡사이신은 처음에는 강한 자극을 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통 작용을 한다는 사실도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자극에 반해 아픔을 무디게 하고 극복하려는 성질이 있으므로.


매운 맛은 단순 미각이 아니다. 혀의 미뢰만이 아니라 입 속의 점막, 입 안 전체로 전달되는 피부자극이다. 즉 통증인 것이다. 통증은 움직임이다. 건드리고 옥죄고 울리고 풀렸다 다시 옭아매는, 활동성의 총체다. 우리 몸에 가장 많이 분포돼 있는 통점을 통해 그 움직임을 기민하게 포착한다. 맵다, 뜨겁다, 차갑다, 딱딱하다, 아프다, 나는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다, 라고.


매운 엽기 떡볶이가, 바삭한 치킨이, 차가운 빙수가 사계절 내내 팔리는 이유가 혹시 나의 통증을 건드려보고 확인해보고 생명성을 다짐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불가능 앞에 주저앉고 무기력 앞에 움츠린 채 펄떡이던 나의 생명력이 굳어지고 둔해지는 것이 서글퍼 아픔을 통해 자신을 일깨워보는 지도 모르겠다. 젊은 날 작정한 무전여행 같기도 하고, 우직한 칠전팔기 같기도 하며, 비극인 것을 알고 시작하는 애절한 사랑 같기도 하다. 그것들을 진짜 해보기가 여의치 않아서 지친 금요일 밤마다 얼얼하고 딱딱하고 머리 아프도록 차가운 것을 끌어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 저녁 우리 부부는 따뜻한 포옹으로도 기운을 차렸을 수 있다. 딸아이 뽀뽀 세례로도 힘이 났을 것이다. 그 같은 진동으로도 활기를 되찾았을 테지만 우리는 좀더 간단하고 강력한 진동을 택했다. 매콤한 울림, 정신이 번쩍 드는 두드림, 화끈한 자극으로 무기력을 떨쳐냈다. 고추장 한 접시가 선사한 활력이었다. 질깃한 낙지 토막과 숨이 죽지 않은 채소들까지 우리를 못 살게 군 덕이었다. 입 속을 뒤흔든 움직임이 삶에까지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남편이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나는 김치찌개를 끓인다. 뜨겁고 바삭한 무언가도 한 접시 내놓는데, 고추기름과 다진 마늘이 들어간 양념장을 곁들인다. 얼음물 한 컵을 밀어주며 맞은편에 앉아 조잘조잘 묻고 답하는 것도 식단에 포함된다. 먼저 먹은 아이는 아빠가 보이는 데서 콩콩 뛰어 놀고,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가 천장에 부딪쳐내려 우리 어깨를 간질인다. 이 장면에 등장한 모든 움직임들을 살펴보라.


움직이는 것에는 힘이 있다. 진동에는 감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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