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것에는 힘이 있다 4부작
움직이는 것에는 힘이 있다. 갓 태어난 아기조차 멈춰선 것보다 움직이는 것에 집중한다. 절제와 여백을 중시하던 선인들의 수묵화에도 잔잔한 움직임이 있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부터 들리고 만지고 맛보는 것조차 움직이는 자극에 더 큰 울림이 있더라고, 나는 몇 편의 글을 연달아 쓰면서 깨달았다. 우리가 이미 움직이는 존재이고, 움직이는 행성에 살며, 움직여 나아가기를 마치 관성처럼 바라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에 비해 글이란 얼마나 시각적으로 정지되어 있는가. 마음 속 울림을 직접적, 즉각적으로 유도하기 위한 온갖 미디어 직격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안정되고 고착된 활자들의 리듬 없는 병렬은 단조로운 옛날 방식 그대로다. 문법을 비틀어 행간을 솟구치게 하거나 크기를 늘였다 줄였다 하며 잔상을 만들고, 삐뚤빼뚤한 손 글씨로 미동을 느끼게 할 순 있더라도 그것은 읽기의 가장 큰 덕목인 가독성에 반하는 것이므로 잠깐의 기교에 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 내용에 맞춰 의자가 움직이고 빗물이 떨어지고 냄새까지 맡아진다는 4D 극장이 생겨나는 판에, 나는 무슨 배짱이 있어 멈춰선 활자 무덤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는 것일까.
우리가 독서 등을 통해 좋은 자극을 받았을 때 감동적이다, 깊은 울림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이미 운동성이 내재된 표현으로, 어떤 자극이 무언가에 부딪혀 되울려 나오는 움직임을 형상화한 것이다. 즉, 어딘가 부딪힐만한 실재적 자극이 있어야 하고, 부딪혀 파장을 일으킬만한 떨판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가 갖춰있지 않다면 소재의 진귀함이나 문장의 수려함은 의미가 없다. 맛깔나게 보이는 모형음식이나 탐스럽게 열린 독버섯과 다를 바 없다. 애초에 먹을 수도 없거니와 몸과 마음에 스며들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읽히는 글, 스며드는 글을 생산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하여, 나의 신호가 실재여야 한다는 것. 나의 글감이, 나의 감상이, 나의 의지가 허구라면 전달 자체가 무의미하다. 실존하지 않는 것을 전할 수는 없다. 없음(無)을 포장해 선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제대로 된 신호로 전달했다 하더라도 상대의 진의까지 깊게 파고 들지 못한다면 소음이나 낙서로 휘발되고 말 것이다. 덩그러니 부피는 있으되 무게도, 밀도도 없는, 촉감도 감상도 없는 추상은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큼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한다.
두 번째는 맞받아칠 지점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상대의 내면에 있는 것이라 내 몫의 일이 아닌 듯싶지만 이를 짐작하고 교감할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컨텐츠 제공자로서 직무유기를 하는 셈이다.
우리는 백색 백인의 삶을 다 살아보지 않았고, 동서고금의 삶 또한 동시에 살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비슷한 맥과 결의 정서란 건 있다. 학도병으로 보낸 남동생을 잃어보지 않았고, 온종일 모래알이 씹히는 서부시대를 겪어보지 않았지만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짐작할 수 있고, 손에 잡힐 듯한 희망이 이끄는 야만을 이해할 수도 있다.
초상집 가서도 내 신세 생각하며 울더라고, 누군가의 상실을 들으면 나의 그것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러면서 함께 애끓든 위로 받든 더 큰 낙담에 빠지든 어쨌든 그 이야기가 나를 흔든다. 우리는 이것을 공감이라고 한다. 교감이라고도 하고 상호작용이라고도 한다. 이웃과 역사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함께 울고 웃고 짐 지고 벌 받겠다는 시민의식이라고도 하겠다. 작가정신이라는 말 앞에 붙어야 할 태도다.
세 살배기를 미술관에 데려가도 아이가 유독 물끄러미 바라보는 작품이 있다. 그림의 어떤 부분이 아이의 경험, 추억, 관심사라는 울림판에 부딪혀 어떤 감상을 자아냈는지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그 작품은 분명 아이에게 읽혔고, 스며들었다. 캔버스 한 장이 해낸 일이고, 무성영화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때론 명확한 침묵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내게는 주절주절 늘어놓을 백지 여러 장이 있다. 공들여 이면지를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은 무참함과 싸울 때도 있지만, 때때로 나라는 독자의 마음부터 움직이게 만들기도 한다.
고3 때 담임선생님이 수학 성적이 안 좋다며 일부러 수학부장을 시키신 적이 있다. 하루 일과 전에 한 문제씩 앞에 나가 수학 문제를 풀고 설명하는 일인데, 정답과 풀이과정이 적힌 지도용 교재가 있었다. 복사기처럼 칠판에 옮겨 적으면 되는 일이지만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이해시키는 과정에서 내가 원리를 깨닫는 일이 돼버렸다.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쓴 글이지만, 맨 윗줄에 내 이름을 쓴 채 퇴고하고 들려주는 과정에서 나는 제1의 독자가 되어 글을 보며 내 감상을 가지런히 하고 의지를 다듬고 실천을 종용하게 되었다. 어쩌면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좋은 사고를 하고, 좋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내 안에서 글을 꺼내놓고, 글이 나를 이끄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자 굴레다. 이 덜컹거리는 순환의 움직임 또한 힘이 있어 나를 진동케 하는 모양이다. 움직이는 것에는 힘이 있다. 진동에는 감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