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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Mar 19. 2021

마니차

매만지는 기도

서른 번쯤 세다 만다. 종일 아이들이 엄마를 몇 번이나 부르나 해서 남편이 헤아려보다가. 주말이라 아빠도 있고 이제 아침 나절 지났을 뿐이다. 애들 말머리에 그저 ‘엄마’가 붙는다. 치즈 꺼내 먹어도 되냐고, 쉬하고 온다고, 블록 쌓은 것 좀 보라고, 모르는 단어 뜻을 묻느라고 두 딸은 일단 엄마를 부르고 본다. 아마 스스로 그런 줄도 모를 것이다. 아빠가 횟수 세는 게 우스워서 입을 꾹 다물었다가도 금새 까먹고 또 엄마, 한다.


비타민 먹었니, 손 씻었니, 일기 썼니, 로션 발랐니, 내가 이르는 소리를 세자면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다. 동일 항목으로 두 놈씩, 간혹 두 세 번씩. 횟수 넘어가면 야단이 되고 어제 것, 그제 것까지 소환이 되니 사위 고요할 틈이 없다. 애들 잠들고 나면 또 내 묵주기도가 이어져 엄마를 찾고 엄마한테 혼나는 일이 연속된다. 성모님. 귀한 천사들 야단쳐서 죄송해요. 성모님. 그래도 저 계속 예뻐해 주실 거죠. 묵주기도란 이른바 이런 식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이 엄마 역할을 하는 듯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는 분. 우리가 어질게 성장하길 바라는 분. 고통 가운데 열심히 그 이름 외면 도움 주시는 분. 아프거나 외로울 때, 분하거나 두려울 때 엄마 엄마 하게 되듯 긴 기도문 없이 그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되뇌기만 해도 그 마음 알아채고 어루만져 주신다 한다. 엄마가, 이렇게 좋은 거다.


그 좋은 자리에 앉아, 그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지고 작고 여린 아이 앞에 인내심을 바닥내는 일은 무참하다. 부끄러움은 한낮의 소란 속에 음흉스레 숨어 있다가 까만 밤에서야 뒤룩뒤룩한 몸피를 드러낸다. 탈없이 하루를 마친 단정한 평화 속 이물감. 그걸 일일이 긁어내야 통잠에 들 터인데 묵주 한 바퀴를 다 돌려도 삭혀지지 않는 죄책감이 만성피로처럼 쌓여만 간다.


사람 마음이란 게 현금 출납부처럼 들어온 것과 나간 것의 셈만 맞으면 되는 게 아니다. 보한 것, 축난 것 다 합해서 대략 적자만 아니면 괜찮은 게 아닌 것이다. 새우 껍질 까주는 남편이 고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예전에 내 억장 무너뜨린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줄줄 저지른 죄들이 하루 한날 특별사면처럼 탕감 받을 수 있다면 세상은 언제든 고쳐 쓰면 그만인 연필 글씨로 괴발개발 어지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너무 염치가 없어서, 부채 원금을 조금은 갚아보자는 심산으로 딸에게 고해성사를 하기도 한다. ‘우와~ 우리 엄마 최고!’ 할만한 이벤트를 대방출하기도 하느라 얼마 전 큰애 휴대전화기가 그렇게 최신형으로 바뀌었다.


오늘은 머리를 빗어 준다. 소파 아래 바닥에 앉게 하고 색색 머리 끈이 든 바구니를 들고 와 아이 등 뒤에 앉는다. 엉킨 데를 살살 빗어 내리고 가르마를 타고 방울을 돌리고 핀을 꽂는다. 기르고는 싶지만 간수가 어려운 열두 살 산발 머리가 이렇게 저렇게 미장된다. 뾰족한 재주는 못돼도 제방 거울 앞으로 달려가 요리조리 살필 아이의 기쁨 되는 것이 뿌듯해 가르마 낼 때는 숨조차 쉬지 않는다.


다른 잔소리할 겨를도 없다. 말없이 머리를 만지고, 머리를 맡기며 우리는 머리칼에도 감각이 있는 듯 달고 쓴 것을 느끼고, 온하고 냉한 것을, 거칠고 부드러운 것을 교감한다. 귀한 것, 짠한 것, 고마운 것, 미안한 것. 머리 만지는 내 손끝에 모든 게 닿고 모든 걸 실어 가만가만 매만진다.


그 시간이 몹시도 애틋하여 갈래 나눈 머리를 또 한 번 땋고, 또 괜시리 틀어 올리는 걸 아이는 알고 있을까.


티베트불교에 마니차라는 것이 있다. 경전 두루마리가 들어간 원통으로 작게는 손에도 들어오고 크게는 사람만 한 것이 사원을 가로질러 일렬로 길게 늘어서있다. 이 마니차를 손으로 한 바퀴 돌리면 경전을 한 번 읽은 셈 쳐준다. 문맹률이 높고 또 생계 때문에 글 읽을 시간이 없는 중생들은 마니차를 돌리면서 지극한 마음을 다한다. 바람개비, 물레방아로도 만들어 자고 있을 때조차 불력이 세상에 퍼지기를 바란다고 한다.


도무지 지상낙원과는 거리가 먼 듯한 주름지고 굽은 손가락이 마니차를 쓰다듬는다. 땅을 파고 빈곤한 밥술을 뜨는 손. 때론 삿대질을 하고 하늘을 가리기도 하는 손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해탈을 바라는 석가모니의 제자다. 정한 마음들이 모여 꺾인 데 없이, 막힌 데 없이, 시작도 끝도 없이, 그래서 쌓이지도 티 나지도 않지만 바닷속 소금맷돌처럼 한없이 마니차가 돌아간다.


아이 머리를 만지는 일이 이와 같다. 네 마음 다 모르고, 네 평안 다 봐줄 수 없어도 나는 무지렁이 농꾼처럼 그저 너의 머리 쓰다듬으며 내 기도를 다할 뿐이다. 지극함이 너에게 가 닿아 순결한 평화를 얻을 때까지 매일 매일 너의 머리칼을 매만질 것이다. 네 등을 끌어안고 해야 할 말, 하고픈 말 모두 삼가고 반듯하지만 아프지 않게 엉킨 곳을 풀고 갈래를 나누리라. 그래야 하리라. 아니 그렇게라도 해야 하리라.


이토록 손 쉬운 수행에도 웃어주는 너희가 있어 나는 살아있는 성모님, 관세음보살 자리를 헐값에 누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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