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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Mar 23. 2021

반성문

울것 같은마음으로 씁니다

방학이 아니라 정학이었습니다. 휴가가 아니라 근신이었지요. 자연이 우리에게, 이번에는 좀 강경한 어조로 말해온 것이었습니다. 상생이 아니면 공멸 뿐이라고. 잠시 멈추고 물러서고 반성하라고 자연이 우리에게 시간을 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소 엄하게, 우리를 생각의 방 안에 가둬둔 셈이었죠.


사람들로 북적이던 학교는 소음과 먼지투성이였습니다. 바이러스가 휴교를 선포하자 모든 것이 사그라들었습니다. 인도를 가로막고 서있던 와플 트럭과 솜사탕 수레, 보리차를 나눠주던 교회 간이탁자와 잡다한 광고지도 사라졌습니다. 아침마다 떠밀려 양말을 꿰 신던 아이들이 느릿느릿 놀 궁리를 하다 엄마가 차려준 점심 밥을 먹고 살이 오릅니다. 새 학년마다 친구 사귀는 일이 근심이던 큰애는 화상회의로 찬찬히 아이들 얼굴을 익히며 만나고픈 마음을 키워가네요.


꽃들도 홀로 온전히 피었습니다. 무당벌레도, 콩 벌레도 수난을 덜 당했지요. 백사장은 정결하고 물새들이 편안히 모여 낮잠을 잡니다. 쓰다 버린 일회용 마스크와 택배 포장지가 무섭게 쌓여가는 걸 빼면 지구는 잠시 한숨 돌리고 있습니다. 사람들 내보내놓고 좀 치우고 쉬느라고요.


징계는 효과가 있었을까요.

대기 중 이산화질소 농도가 급감했다더군요. 출입이 통제된 인도 해안가에 장수거북 80만 마리가 산란했다지요. 관광객으로 인해 사라졌던 멕시코 해안의 발광 플랑크톤이 60년만에 다시 돌아왔답니다. 7년째 오르내리는 뒷산 계곡에서 나는 백로를 처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미세먼지 수치가 좋아졌고 강과 바다가 맑아졌습니다. 인적이 줄어든 덕에 사람살기 좋아졌다는 소식은, 그러나 기쁘기만 한 얘기랄 수는 없지요.


사망자도 많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정서적인 후유증도 계속해서 생겨날 겁니다. 도심 속 광장은 비었어도 온라인 싸움터에는 고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비난과 혐오, 차별과 원망이 바이러스처럼 널리 퍼져가지요. 백신을 만들고 맞는 과정에서 또 다시 오염되어야 할 지구와 재난마저도 불평등한 생들이 안타깝습니다.


사명감 넘치고 가슴 뭉클한 일화가 넘쳐나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웅크린 일상이 더욱 남루해 보이기도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도 있는데, 사지에 자청해 나서는 사람도 있는데, 죽음 같은 절벽 앞에 내몰린 사람도 있는데 내가 고작 이런 불편, 고통, 갈등으로 힘들다 투정 부려도 될까 하는 마음이 짐스럽습니다. 철없고 이기적으로 여겨져 억누르고 감춘 상처가 각자의 마스크 안에 갇혀 곪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개발을 위해 야생박쥐 서식지까지 훼손하는 일이 앞으로는 사라질까요. 목화 재배를 위해 무리하게 지하수를 끌어 쓰는 일이 줄어들까요. 그렇게 지표수가 메마르고 반 년 동안 산이 불타고, 또는 생업을 위해 불 지르는 일을 이제 멈출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학 기간 중 반성문을 써낸 사람이지만, 그 대답을 해야 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입니다. 살 궁리가 마땅찮아 화전이라도 일궈야 하는 사람, 하청의 하청 신세여서 유해한 줄 알면서도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 사랑할 권리조차 금지되어서 음지로만 숨어 들어야 하는 모두와 함께 말이지요.


22세기의 사람들이 훗날 21세기 사람들을 원망할 지 모른다는 누군가의 한탄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이전 세기의 야만성과 우매에 기함하곤 했지요. 비윤리적이고 반생명적 처사들에 반해 훨씬 합리적이고 평화지향적인 공감대와 제도를 만든 건 사실이지만, 성장 위주의 열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가는 치뤄야 하네요. 나중에 나의 증손자들이 미세플라스틱으로 오염된 바다생선을 꺼리며 왕 할머니 세대의 실수와 실패를 개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불편하고 어지러워도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아이들과 이렇게 함께 벌 받는 것만도 미안해 죽겠어요.


어울리며 배워야 할 녀석들의 권리를 내어놓고 문 닫힌 교실 앞에서 체념해준 아이들입니다.  입학식과 졸업식, 나눠먹던 소풍 김밥과 둘러앉으면 웃음부터 나는 조별 토의, 응원전이 더 재미있는 발 야구도 사라져버렸지요. 또래들과 아장대며 햇볕을 쬐어야 할 아가들도 안쓰럽습니다. 마스크를 손에 꼭 쥐고는 신발장에 앉아 바께, 바께 하며 칭얼대는 이 울음이 대체 어디에 가 닿아야 하는 걸까요.


엄마는 다짐합니다. 성별이야 어찌되었건 그 울음에 가슴 아픈 마음은 엄마 마음일 겁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 더 안전한 내일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 나의 비극이 나에게서 끝나지 않고 아이의 미래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기름 묻은 일회용 그릇을 박박 씻고 말리는 마음 말입니다. 그 마음으로 돌봐야 할 일을 생각합니다. 화내야 할 일과 고쳐야 할 일, 감내할 일과 끝내 고집 부려야 할 일을 떠올려 봅니다.


한탄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지만 깊은 한숨으로 시작하는 반성문도 있는 법입니다. 뭔가 잘못 돼간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변화가 시작되곤 하니까요. 한숨 좀 쉬고, 한숨 좀 돌리고 끙차 일어나 해야 할 일을 찾아봐야겠습니다.그 전에 반성문을 씁니다.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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