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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Mar 24. 2021

알타리할머니

그녀의 새 소꿉살이

우리 영감 좋아하는 알타리. 반질반질 다듬어놓은 것이 나 어여쁘던 날 뽀얀 뒤꿈치 같다. 그 날을 사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부러 한 단 더 달랜다. 검정 비닐봉지 안에 가둘 수 없는 단단한 싱그러움. 어정거리는 걸음으로는 탱탱한 그것들을 데려가기에도 벅차다. 한 단이면 족했을 것을.


내 자식들 머리통이 저렇게 다글다글할 때는 철 맞춰 김치 담가 먹이지도 못했다. 남 일이라 열심히, 내 일이라 또 열심하느라 푸근히 앉아 양념 버무릴 짬이 없었다. 맡겨 논 삼 남매를 찾으러 가는 저녁 어스름은 늘 다급했고 늘 애처로웠다. 더 늦은 남편 상 앞에 앉아 생선가시 발라줄 시간인들 있었을까. 귀한 줄 모르고 써버린 시절은 가고 거친 발꿈치와 삭은 무릎이 빚처럼 남았다. 그때 못 끓인 조기찌개에 새 밥 지어 올려내면 갓 버무려도 맛있고 새들하니 익혀도 잘 먹으리라. 밥 숟갈 오를 크기로 잘라 먹이던 아이들이야 제가끔 제 식탁을 차려 나갔으니 이제는 종아리살 물러 가는 우리 영감만 해 먹이면 되는 일이다. 그저 통째로 집어먹어야 맛이라던 식성대로 치아가 거들 수 있을지는 올해 상 위에 올려놔 봐야 알 수 있으리라.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한 단만 하면 되었을 것을.


광대뼈가 불거져 가만 있어도 성난 표정 같더니만 요새 보니 그 뼈만큼 살가죽이 도도록하여 텅 빈 내 볼보다 보기 낫다. 사우나라도 하고 나오면 두 볼이 반질반질한 것이 장난치기 좋아하는 어린애 같다. 외지 억양 내 말투 듣고는 화내는 줄도 못 알아채던 양반. 이제 와 그 사내가 가여워 보이기도 하는 것은 거울 속 내 모습이 비춰서일까, 나이 들어가는 아이들 얼굴이 보여서일까. 새벽미사 모여 앉은 주름진 마디마다 기도들이 제가끔인데, 그이 기도는 우리 마누라 성내지 않게 해달라는 것뿐이라니 세월이 흘러도 너무 흘렀나 보다. 왕창 쏟아져 주워담을 수도 없을 만큼 가버려서 이제는 내가 쑷갓 무치는 법을 배워 그이 입에 흐뭇이 들어가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으니 젊어서는 알 수 없고, 젊었기에 알기 싫던 일을 이제야 깨닫는다.


헛헛한 미안함 때문에 한 단만 사도 될 걸 욕심 부려 들고 오다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얼굴을 다쳐 식탁 마주 앉은 지청구를 며칠이나 들어야 할 테지. 우리 영감 새벽기도가 한 자락 더 늘게 생겼다.


라고 나는 홀로 상상했다. 두 주째 공부방을 결석한 할머니 문우께 전화를 드리고 나서. 본래도 늘 겸손한 노작가는 그 알타리를 한 단만 샀어야 했노라 재차 겸연쩍어 했다. 괜히 걱정들 할 테니 여차한 사정은 전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나는 그 짧은 통화와 그간 작품이나 대화로 알게 된 신변, 평소 성정을 버무려 이처럼 상상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확신했다. 아무렴 알타리는 두 단을 살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분명 그녀만큼 나이든 누군가가 팔고 있었으리라. 스산한 가을 길, 시린 무릎의 하소연을 들어가며 집으로 향하던 그 길에 알차고 맨들거리는 그것들이 대야 요람 속에 누워있었을 것이다. 아이들 고만고만하던 때 같고, 그 시절 내 곱던 팔꿈치 같고, 한 입 크게 베물던 남편 두 볼 같아서 차마 한 단만 사서 돌아설 수는 없었으리라. 앉아도 서도 굽어진 허리를 한겨울 잠바로 싸맨 장사치에게 값을 치르는 일까지도 뭉클했으리라. 따스한 집이 지척이고 양념통이 갖추 갖추인 부엌이 있고 이른 저녁 집으로 돌아와 반색할 남편을 떠올리며 그녀는 감사 기도를 올렸을지 모른다. 어제보다 더 썰렁해진 날, 작년보다 더 느려진 걸음, 더 쇠한 기운을 몰라서가 아니라 잘 알고 있기에 더욱 마음 급하게 그녀는 기어코 두 단을 사 들고 와야 했다.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이왕이면 지금보다 조금 더 무사한 모습이면 좋았을 테지만.


그녀의 알타리 김치가 맛나게 담가졌기를 바란다. 남편의 들큼한 타박까지 보태져 정답게 익어가길 바란다. 나물 한 가지씩, 절임반찬 한 가지씩 만드는 법을 물어 익히는 그녀의 소꿉살이가 언제고 재미지기를 바란다. 다음 알타리 제철이 오기까지. 그 다음의 다음, 더 한참까지도.


한편 그날 저녁 꽃게 살을 일일이 발라내 된장찌개를 끓인 나는, 밥 한 그릇 더 달라는 남편의 에두른 칭찬을 받았다. 몸과 마음이 푸근하니 딸들과 장난치는 시간 또한 넉넉해지더라. 이래서 우리는 ‘언니’가 필요하다. 인생의 기쁨과 보람을 알고, 후회되는 것과 그것을 고쳐가는 것까지 다 알고 겪은 선배 말이다. 모든 언니들의 뜨듯한 행복이 영원하기를.



*이 글을 할머니께 미리 보여드리지도 못한 채 한달 뒤 김욱희 마리테레사 영면에 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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