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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Mar 25. 2021

밥과 똥

아득한 밥의 여정

그렇다. 그다지 상쾌한 주제는 아니다. 어제도 그제도 먹은 밥에 무슨 참신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며 후자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말자. 하지만 여기에 갓난아기가 등장하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자고로 광고업계에서도 3B, 즉 미인Beauty 동물Beast 아기Baby가 등장하면 사람들 환심을 끌어낼 수 있다 하였다. 그러므로 조금만 더 인내를 가지고 마저 읽어주길 바란다.


나는 지금 생후 두 달 된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고 있다. 산고보다 힘들다는 젖몸살을 헤치고 한달 만에 닥친 유구염을 뚫고 마침내 순도 백 프로 모유만으로 아기를 키우는 중이다. 이렇게 젖 뗄 때까지 모유만 먹인 것을 엄마들끼리 '완모'라고 부른다. 분유만 먹이는 '완분', 섞어 먹이는 '혼합'과 구분된다.


많이 터울 진 둘째인데다 마흔을 넘긴 노산이라서 제대로 물릴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몸의 영양이 한 번 빠져나간 뒤인데다 큰애 챙기기 바쁜 대부분의 다자녀 엄마는 둘째 완모가 어렵다고들 했다. 하지만 젖만으로 첫째를 키운 나로써는 쉽게 단념하고 싶지 않았다. 세돌 넘도록 잔병 한 번 안 치른 제 언니에게 하던 만큼은 해주고 싶었고, 늙은 엄마이기에 앞으로 포기해야 할 수많은 관문 중 첫 고비를 보란 듯 뛰어넘고 싶었다. 무엇보다 함께 땀을 쩔쩔 흘리면서 아기와 심장을 맞대고 젖을 물리고 빠는 그 벅찬 감격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정말 힘든 일이다. 누구와도 분담할 수 없는 일이고 잠시도 쉴 수 없는 일이다. 하루 도합 너 댓 시간씩 반년만 해보면 등이 끊어지고 어깨가 주저앉는 일이다. 외출했을 때 적당한 수유실이 없으면 난처한 일이고, 그렇다고 화장실에서 숨어 먹이기엔 분통한 일이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다. 거룩한 일이다. 둘째든 셋째든, 제왕절개를 했든, 쌍둥이든, 유축기로 짜서 젖병에 담아 먹이든 어떻게든 모유를 먹이고 싶다 엄마들은. 그렇게 가슴 마사지를 받고, 젖 잘 나오는 한약이며 허브티를 마시며 완모를 향해 용맹정진하고 있다.


그리고 밥이다. 아주 기를 쓰고 밥을 먹고 있다. 소고기나 조개, 때론 생선으로 끓인 미역국과 함께 삼시세끼를 챙겨먹는다. 아침은 학교 가는 큰딸과 함께, 점심은 조용히 빠르게 국에 말아서, 저녁은 가까이 사는 친정엄마가 와계실 때 먹는다. 필사적으로 먹은 밥이 아기 몸 속으로 젖이 되어 흘러간다. 내 배 속에서 빠져 나와 이제는 각자의 밥통을 가지게 되었건만 우리는 아직도 한 밥을 먹고 있는 셈이다.


때로는 끼니를 거르고 그저 자고 싶기만 하다. 고픈 배야 나중에 빵 한 조각으로 때워도 그만이고 너무 피곤할 때는 허기를 느끼기도 고된 법. 하지만 먹어야 나온다. 확실하다. 즐겁게 먹든 힘들게 먹든 따신 밥을 푹푹 떠 먹어야 젖이 나온다. 식사 중간쯤에 벌써 짜르르하고 젖 도는 느낌이 난다. 아기 잘 때 벌러덩 누워버리고 한 끼를 놓치면 다음 젖 먹일 시간까지 가슴이 단단히 차질 않는다.


보통 체구의 여성 기준으로 하루 2천5백 칼로리의 밥과 간식을 먹어야 한다. 기름져서도 안되고, 자극적이어서 안되며, 카페인이 들어서도 안 된다. 고춧가루가 많이 든 것도 삼가며, 회충약을 먹을 수 없으니 날 것도 위험하고, 밀가루 음식도 아이 속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 단백질을 집중적으로 섭취해야 하고 따뜻하게 먹는 것이 좋다. 그렇게 밥상을 차린다. 냉장고에서 미리 해둔 반찬 통을 꺼내지만 밥과 국만은 뜨겁게 먹는다. 콩과 보리를 섞고 현미와 백미를 보태 저녁마다 밥을 안친다. 솥뚜껑을 열면 밥 냄새가 와그르 쏟아져 나온다. 들큰하면서 따끈한, 그 풍요로우면서 노곤한 정경 가운데 나는 코를 킁킁거리다 문득 어떤 낌새를 차리고 아기 방으로 달려간다.


"아이쿠! 우리 아기 응가 했나 보네."


후다닥 기저귀 들춰보기를 여러 번. 나는 그제서야 밥 냄새와 아이 똥 냄새가 똑같다는 것에 탄식했다. 그렇다. 내 밥이 젖이 되고 그 젖이, 오로지 그 젖만이 아이의 순결한 내장을 적시고 다독여 샛노란 똥이 되어 끝난다. 이토록 아득한 밥의 여정을 본 적이 있는가.


그리움처럼 아련하고 동화처럼 흐뭇한 밥의 여정이, 그 똥이 나는 이렇게나 감격스럽다. 기저귀를 벗기고 보드라운 엉덩이를 씻기면서 내 밥은 소임을 다한다. 낮잠과 바꾼 밥, 뜨신 김이 내 목덜미를 껴안던 밥, 친정엄마가 아픈 어깨로 손녀를 안아주며 지켜낸 딸의 밥. 그 밥이 가만가만 제 길을 따라, 엄마에게서 아기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새 생명이자 신 인류, 미래와 희망으로 연결되는 길을 따라서 여행을 마쳤다. 그리고 또 반복된다. 저 미래가 더욱 딴딴해질 때까지, 더욱 안전해질 때까지 밥의 일은 계속된다. 엄마의 일, 엄마의 엄마의 일도 계속된다.


이 일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이렇다 할 생색도 못 내겠다. 제대로 먹지 못해 두 가슴을 달고도 갓난아이를 굶기는 가난한 엄마들, 울 힘조차 없어서 흑요석같은 눈만 끔뻑이는 여윈 아기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눈물로 젖 한 방울이 빠져나가는 것도 아까워 고개를 돌리고 만다.

지금은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감사한다. 파르스름한 미역국와 보얀 쌀알, 유채꽃처럼 노랗게 만개한 똥에게 감사한다. 언젠가 이 고마움을 온 세상에 갚아 나갈 날이 있기를 기도하며.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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