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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Mar 29. 2021

푸릇푸릇

엄마가 제철


원래가, 공부 좀 해야 되는데 하고 책상에 앉으면 연필이 깎고 싶은 법이다. 서랍정리가 하고 싶고 청소가 하고 싶고 보통 때는 귀찮고 별 일 아니던 게 다 재미있다. 공부만 빼고 다 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번성한 것이 집필실 화분들.


일년 전 막내를 어린이집에 입학시키고 사무실을 하나 냈다. 일부러 번화한 곳부터 둘러보다가 오답 지워가며 정답 골라내듯 볕 바르고 한적한 곳으로 계약했다. 같은 건물 2층에서 클래식 음악강의를 한다는 사장님께 작가라 소개하는 일은 가슴 벅찼다. 푸른 층층이 하늘과 바다가 반씩 담긴 거실 창 앞에 길이대로 나무 평상을 짜 넣었다. 기가 막힌 책 한 권이 나오리라, 자다가 꿈을 다 꾸던 봄이었다.


인테리어 삼아 화분 몇 개 들인 것이 일의 시작이다. 무릇 생명 있는 것을 들일 때는 그 무궁한 가능성을 가늠해야 하거늘. 하물며 공부방의 공부 아닌 소일거리란 감질나는 애정 속에 얼마나 번창하기 좋은지. 그렇게 분갈이 해나간 흙 화분이 열 여덟 개요, 물 화분이 일곱 개다. 잘못 센 줄 알고 재차 헤아린다. 그 사이 지인들에게 나눠준 몇몇은 셈에 넣지 않았다.


바빠서, 번잡해서, 애들 저지레가 겁나서 이렇다 하게 뭘 길러본 적이 없다. 베란다 귀퉁이에 내버려둔 산세베리아 흰 꽃이 저 홀로 폈다 졌다 할 정도랄까. 공들여 물주고 가꿔서는 꽃구경을 할 수 없는 종이라 했다. 필력보다 식재력이 늘었나. 창가마다 도열한 화분들이 내 영감을 키워줄 햇살과 바람, 새 소리를 가로채 받아먹었나. 변명거리가 없어 무참하다. 오늘도 시간 내 화분에 물 주러 출근했으면서.


아이들이 사상 유례없이 길고 특수한 방학 중인지라 한달 만에 들렀다. 흙이 마르고 잎줄기가 쪼그라들어 앓고 난 뒤 헐거워진 바지 품마냥 허전하다. 컴퓨터는 본체만체 허겁지겁 물부터 준다. 싱크대와 화장실로 옮겨 흠뻑 준다. 개중 잎이 앙증맞고 도톰한 것들은 그런대로 생기가 남아있지만 잎이 크고 넙적하면서 얇은 축들은 누렇게 오그라붙어 바스락거린다. 그런데도 다 죽은 것은 아니고 제일 먼저 자라서 좋은 날을 본 것부터 그렇다. 처음 솟아나서 화려하게 펼쳐 보이던 것부터 이만하면 여한 없었노라, 하듯 저물고 있다. 와중에 새로 돋을 것은 악착같이 돋아났다. 전장에 핀 들꽃처럼, 상중에 난 아기처럼 애틋하고 기특하게, 작지만 영롱하게 한 살림 생을 부려놓았다.


바싹 마른 나의 글 밭에도 움틀 기미가 있으려나. 겉은 말라도 속은 깊어서 촉촉하게 버티며 힘을 농축하고 있는지. 쌀 씻고 멸치 볶고 콩나물 대가리 따는 소모전 속에서도 좋은 글을 쓰리라는 마음 하나만은 더없이 맑고 단단히 여물고 있을까. 언제 끝날 지 모를 바이러스와 또 육아라는 장기전에서도 짬짬이, 따발총보다는 단검을 들고 날렵하고 신속하게 집중해 꽃망울, 글망울을 틔울 수 있을지. 가진 내공이 두둑한 것들은 기근에도 생기를 잃지 않았듯, 흙이 다 마를 때조차 뿌리를 공고히 하고 버릴 것을 추려낼 기회로 삼았듯, 나도 이 긴 글 가뭄을 영리하게 날 수 있을런지.


한 시간 뒤면 또 일어서야 한다. 붙인 엉덩이가 뜨끈해진다 싶을 때,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알레그로 템포에 접어든다 싶을 때 이내 나설 시간이 된다. 생각해보니 감질나는 건 이 일도 마찬가지다. 글 쓰러 와서는 화분 돌보기가 그렇게 재미지더니, 유치원 들러 아이 받아다 집에 갈 생각하니 이 창작 고문도 이렇게 재미있다. 이렇게 복되고 감격스럽다. 조금 모자라고 조금 불완전한 속에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법. 어쩌면 지금이 가장 꽃 피우기 좋은 때인지도 모르겠다. 물이 푸질 때, 햇살이 넘칠 때를 두고 굳이 아직 쌀쌀하고 건조한 때 일을 내는 봄꽃들만 봐도 그렇다.


기막힌 책 한 권 내기란 그저 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살면서 가뭄에도 홍수에도 바쁠 때도 아플 때도 도톰하고 반짝이는 잎사귀 한 장 건사할 수 있다면 그만한 운도 없을 것이다. 시간 쪼개 바지런히 읽고 쓰고 마음가짐 돌보며 문장으로 옮겨두는 것. 그 어떤 절망과 결핍의 시대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쓸 수 있는 이 영광을 누리면서 꼭 해야 하는 일이고.


오페라 여주인공의 힘차고 기교 넘치는 독주가 솟아 오른다. 아래층은 수업이 한창인 때, 나는 생이 한창이어서 자리를 뜬다. 엄마라는 생, 주부라는 생. 그 생의 하이라이트에서 푸릇푸릇, 시들어질 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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