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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Apr 27. 2021

엄마 없이는


가족이 사랑만으로 굴러갈 양이면 세상의 법은 절반이면 충분할 것이다. 세상의 시도, 소설도, TV채널도 반까지나 필요 없을 것이며 그보다 재미난 게 천지일 테니까.


그러나 가족은 재미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가족은, 가족애는 온갖 책무와 양보가 약간의 억울함과 버무려진 상태로 운영된다. 그 안에서는 사랑한다는 말보단 고맙다는 말이, 그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가장 거룩한 고백일지 모른다. 모세의 석판에는 가족에게 미안해하라는 계명이 새겨져 있어야 했는지도 말이다.


사랑은 어느 한 쪽의 숭배 속에서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 쪽이 녹신하게 져주겠다는 든든한 믿음 속에서 맘 편히 사랑만 하며 지낼 수 있다. 그 상호확신이 흔들리거나 의심 받을 때 사랑은 불가해진다. 견제와 원망, 의혹과 비난 속에 자기연민이 담석처럼 응어리진다. 장담컨데 이건 하느님도 못 달래준다.


부부만이 아니라 모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단 한 번도 거부 당할 것을 상상해본 적 없는 어린 딸은 엄마의 거절이 시작되는 것에 당황한다. 그리고 좌절한다. 엄마가 나를 두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춘기 초입의 불안이 그렇고, 엄마가 나를 내버려둔 채 동생 병실에서만 여러 날을 보낼 때, 며칠 만에 돌아와서도 나를 뭉개져라 안아주기는커녕 당신의 피로에 굴복해 숙명적 모성애를 갑갑한 양말마냥 벗어 던지고 지쳐 잠들 때 사랑은 그만 평등해져 버린다. 제각각의 사정이 죄다 감안되면서 절대적이지도 초월적이지도 않은 속세의 그 무엇이 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모녀 간의 첫 박리가 이뤄진달까. 한참 전 아이를 낳았어도 한몸처럼, 숙주처럼 존재하던 엄마가 딸을 동등한 객체로 출산해 내보내는 과정이다. 딸 입장에서는 떠밀려 보내지는 첫 이별, 첫 상실. 그렇게들 애증이라 불리는 관계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하자 딸은 엄마에게서 자신의 미래가 보인다. 엄마는 딸에게서 고쳐 쓰고픈 과거가 보인다. 조금만 더 근사하면 좋을 나의 미래, 그리고 너로써 다시 살게 된 나의 두 번째 삶. 서로를 지독히 아끼는 눈에는 한없이 모자라 보이기에 부당함에 항의하듯 서로를 독촉한다. 내 딸은, 우리 엄마는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며 발을 구른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사그라들지 않는 한,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애정이 멈추지 않는 한 계속 되어야 할 조바심이다.


각자의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와 시도하는 이 엇갈린 도킹 때문에 우리는 눈 앞의 소울 메이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참 괜찮은 사람, 나랑 정말 잘 맞는 서른 남짓 터울의 친구에게 남보다 못한 서운함을 느끼기도 한다. 문제의 타임머신에는 지나치게 정밀하고 완벽한 기능, 이를테면 최상의 예측, 견제, 부양, 육성 대안책을 기획하는 프로그램이 탑재돼 있어 그냥 대충 봐주고 넘어가는 법이 없다. 프로그램에 오류가 없다 한들 실행에 무리가 따른다면 포기하고 남는 것이 미련. 바로 여기서 가족애라는 즐거움에 아쉬움이 물고 늘어지며 행패를 부린다.


다만 와중에 공공의 적이 나타나면 얘기는 180도 달라진다. 딸은 엄마의, 엄마는 딸의 최정예 저격수가 되어 서로를 지켜낸다. 그 대상이 남이건 혈연이건 운명이건 관습이건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 걸고 맞서 싸우며, 필요하다면 세상 모든 모녀들과 연대하여 세대를 잇는 싸움도 불사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적은 없었던 때가 없었고, 서로를 타박하는 순간에조차 우리의 두 손은 서로를 붙들고 있다. 때로는 좀 땀 찬다 싶을 정도로.


지난겨울,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엄마가 뒤에서 오는 자전거에 부딪쳤다. 단지 내 시시한 산책길이었고 초등학교 2학년짜리 세발자전거였지만 골다공증 할머니에게는 대퇴골이 두 동강나는 사건이었다. 목격자 연락을 받고 뛰어가보니 어느 늙은 여자가 차가운 바닥에 마치 로드킬 당한 짐승처럼 쓰러져 있었다. 앰뷸런스 경광등이 요란했고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여자애가 훌쩍거렸으며 구급대원이 재차 물었다. 그러나 그 소요 속에 줄곧 들려오던 소음 하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째깍째깍 타이머 돌아가던 소리. 유전자 사이에 실려온 그 시계, 욕망의 시침과 연민의 분침이 얽혀있던. 평생 엄마에게 알람 맞춰져 결코 멈출 리 없던 그 시계가 우뚝 제자리에 서고 만 것이었다.


엄마와 나 사이 모든 빚과 이자가 일순 사라졌다. 애초에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더 좋은 엄마 더 좋은 딸 같은 것, 더 나은 삶을 향한 연대와 반목 같은 것, 개인으로 살아내는 역사적 종의 사명 같은 것. 그런 건 그저 손오공 본체가 쓰러지면 머리털 몇 가닥으로 사라지고 말 허상의 분신들일 뿐이다. 나는 단지 엄마를 잃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수술, 치료, 재활의 시간들이 흐른다. 엄마는 아직도 절뚝거리고 굵은 쇠심과 진한 수술자국이 세월에 녹아 들진 못할 것이다. 나는 엄마를 닦달하는 일을 관뒀다. 대합 다져 넣은 미역국을 끓여 나르거나 구이용 갈빗살을 냉장고에 넣고 올 따름이다. 미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달맞이길 까페에 모셔가고, 생강나무가 용쓰고 꽃 틔우는 걸 보여드린다. 엄마의 꽃은 스스로 피워낼 것이다. 아니 활짝 피지 않아도 된다. 그저 흔들리며 서 계셔도 괜찮다. 이가 몽땅 빠지거나 앉은 채 엉덩이를 끌며 다녀도 괜찮다. 엄마가 내 엄마로 있어주기만 하면 나는 나로 살 수 있고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있다.


동백꽃 절명해 드리운 야트막한 오르막길, 아이 둘이 외할머니를 에워싸고 함께 걷는다. 한 손은 손녀 손 잡고 한 손은 발바닥 세 개짜리 지팡이를 짚는데, 큰아이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만 있다. 둘째 저 다정함도, 큰놈 저 어진 구석도, 이 풍경을 눈물겹게 바라보는 내 마음도 다 엄마에게서 왔다. 엄마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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