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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Nov 19. 2021

괜찮지 않습니다


올 한해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는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 일 겁니다. 코로나라는 돌부리에 걸려 온 세계가 넘어지고 신음했으니까요. 사람들은 쉬지 않고 위로했습니다. 희망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겠지요. 실제로 지구는 처음으로 안식년을 맞이했습니다. 잠시 멈춤. 양적 극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요악처럼 벌어진 이 일로 바다거북과 해파리가 충분히 쉬면서 생을 음미하더군요.


그러나 넘어져도 쉴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찢긴 채 고립되고 유실돼가는 시간을 휴지기라고 말할 순 없겠지요. 그들에게는 이 작은 위로가 얼마나 속 편한 소리로 들렸을까요. 어떤 위로는, 뜻하지 않게 상처를 덧나게도 만들더군요.


인류의 위로품앗이는 오랜 전통이었을 겁니다. 치타의 허벅지나 사자의 목청, 개구리의 위장술도 갖지 못한데다 호르몬에 휘둘리는 인간은 단체 협업의 삶이 유리했겠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았을 테지요. 혼자라면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상대적 열등감도 심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친절함을 갖춰야 하고, 우세와 열세의 판이 언제 뒤바뀔 지도 모르니 연민과 동정의 업을 쌓아둬야 했을 겁니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행위는 적금처럼 내 평판에 쌓여있다가 나의 위기 때 구조 키트가 되고 회생 밑천이 돼주니까요. 인간이 가진 이타심의 근원에는 이런 영리한 투자의 개념이 들어있고, 또 그렇게 이해해야만 이타주의가 좀더 폭넓고 탄탄하게 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란 몹시 난감합니다. 괜찮지 않은 일이 벌어져도 괜찮냐는 말이 먼저 앞서는 우리입니다. 큰일이 닥쳐도 그것보다 더 큰일이 일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말하는 우리입니다. 상대가 괜찮다고 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던진 호의가 때로 공명판에 가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소멸되기도 합니다. 괜찮지 않다는 답 앞에서 다음 말을 찾지 못해 더욱 헛된 곳으로 몰리고 말지요. 위로를 받아주는 근력, 공감과 교감의 체력까지 무너지고 만 그들에게 나는 뭘 해줄 수 있는 걸까요.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는 글로도 쓰지 않던 날이 있었습니다. 결어를 머리에 두고 단숨에 달려가던 키보드였는데 이제는 풀썩 쓰러져 정적을 게워내네요. 답답한 마음 쥐어짜가며 글을 잇는 것은 무지마저 고백할 줄 알게 된 겸허의 산물일까요, 모르면서도 덤벼대는 뻔뻔함의 소치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그저 해가 갈수록 글에 의존하는 마음이 깊어져서일까요. 어리숙하여 슬픈 것이 적던 유년기가 그립습니다. 핀잔 들을 것을 겁내 의견이 갈릴만한 말 앞에서 지레 움츠린 내가 안됐기도 하고요.


일단은 지원금을 신청하지 않아보았습니다. 기부를 늘려 보았습니다. 모든 외부일정을 끊고 삼시세끼를 해먹었습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더 철저히 하고 혼자 계신 분들과 자주 통화 나눴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괜찮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단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묻는 게 자연스러워서, 또 그렇다는 답 들으면 내 마음 편해지는 게 좋아서 괜찮지 않은 이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일렀습니다. 괜찮아? 라고 묻지 말고 차라리 어쩜 좋냐고 같이 속상해하라고. 괜찮음의 원을 그려 그 안과 밖을 나누지 말라고 말입니다.


위로는 누구에게나 본능 속에 자리잡은 원초적 기질입니다. 포기해야 할 100가지의 당위 속에서도 그러지 말아야 할, 그러지 않고 싶은 한 가지 이유에 매달리는 게 되지요. 그 단 한 가지 이유, 그 가느다랗고 조악한 동아줄이라도 던져주고 싶은 게 또 인간이기도 하다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헛헛한 인사말에도 고약한 저의 같은 건 분명 없을 테지만, 그래도 나는 그 말만은 삼가해 주십사 청하고 싶습니다. 넘어져도 쉴 수 없는 처지를 헤아려 주세요. 그 마음을 함께 탄식해주기만 해도 때로는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지 않은 분들께도, 어쩌면 좋으냐고 함께 발 구르는 분들께도 희망이란 놈이 비위도 좋게 스멀스멀 기어오르겠지요? 그럴 테지요? 저 속 없는 야초들이 그렇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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