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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Nov 15. 2021

지구 면역력



지구가 백신을 맞느라 욕을 본다. 코로나라는 백신. 약해진 면역력에 고열과 동통이 자심하다. 변이라는 부작용도 맞닥뜨렸다. 아직 건강했을 때 맞았으면 좋았겠지만 더 늦어도 큰일 날 일이어서 지구는 미량의 항원을 주입하곤 목하 앓아 누웠다.


B형간염 백신처럼 알맞은 접종시기가 도래한 것일까. 독감 백신처럼 지속력이 짧아 해마다 이 난리를 쳐야 하는 것일까. 바이러스는 자꾸만 악랄해지고 백신도 독해져 간다. 자기파괴적 소모를 자행하는 바이러스. 지속 가능한 생태계 면역체계를 무너뜨리는 바이러스. 인간이라 칭해야 하겠는가. 인간의 오만쯤이라고 해두자. 성장우선주의와 근시안적 독단, 교감 없는 이기심이 바로 그 바이러스의 이름이라고.


백신에 담긴 항원이 지구 몸 안에서 통증을 일으킨다. 어지럽고 부어 오르고 때론 괴사하고 고사하는 부분이 생긴다. 어쩔 수 없다. 얼마나 이 기간이 지속될 지가 관건이다.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에게는 생명과 생계가 위협받는 위기지만, 45억년 지구에겐 눈 깜박할 새도 안 되는 찰나의 발열. 백신은 본디 이런 식으로 생착하는 법이라지만.


오래도록 지구의 안전을 위협해온 바이러스를 퇴치하려면 이 방법 밖엔 없는 것일까. 건강할 때 건강을 챙기는 우아한 방법은 동기가 노골적이지 않아 종종 실패하곤 한다. 상실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것, 잃은 뒤 애걸하는 것은 미련 맞아 보이지만 가장 확실한 동기 부여다. 잃은 후라도 부랴부랴 외양간을 고쳐야 공존으로만 살 수 있는 이 생존 시스템을 완전히 망치지 않으니까.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부분이 떨어져나가는 것은 반갑다. 코로나 이후 다시 돌아온 장수거북 떼를 경이로움으로 환영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거세 속에 휩쓸려 추락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조금도 그렇지 않다. 탄식과 공포가 우리를 에워싼다. 그럴수록 무리 중 가장 약한 개체를 맹수에게 내주는 손길에 주저함이 사라진다. 가장 낮고 위험한 데서 버티던 이들이 가장 불합리한 일과 가장 해로운 일, 가장 거북한 일을 떠맡는 것을 지켜본다. 마치 방사능이 유출된 후쿠시마 원전 공사장으로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가 빨려 들어가듯. 그 중 쉰 명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했다.


낡고 삭고 허물어진 경계에 아슬아슬 놓였던 이들이 인류가 의뭉스레 낙관해온 사다리 아래로 추락한다. 시대 유감 속에 생매장된 이들은 부조리의 증좌가 될 수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다. 누사 이래 우리는 그 누락된 자들이 켜켜이 쌓인 공동묘지 위에 희망을 파종하고 진화를 체득해온 셈이다. 그로써 디스토피아는 잠시 유예되었으나 인류의 반성은 늘 조루하여 생명력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네 뼘 길이 화분에다 작물을 기르고 있다. 방울토마토로 시작했다가 청경채, 무순, 강낭콩까지 왔다. 애틋한 콩 스무 여 알이 쌀에 섞여 끓는다. 갓 지은 밥 반 공기를 씹어 삼키니 꼬투리 속 자글거리던 햇살과 바람과 비와 구름이 같이 목을 넘어간다. 현미경 없이도, 유전자 증폭검사 같은 것 없이도 알 수 있다. 이 뜨겁고 실한 것이 몸 속으로 들어와 나를 살리려는 것을.


종국엔 이 일만 남을 지도 모르겠다. 알곡을 지켜 모든 숨붙이들의 생을 건사하는 일. 그 소명에 요령을 부리다가는 지구로부터 바이러스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집필실 아래층에서 클래식 음악수업이 재개되었다. 웅장한 교양악단 협주에 창 밖 새들이 아리아를 얹는다. 새 여덟 마리 중 한 마리는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 바다에 사는 것은 삼분의 일만 살아남아 우리 후세의 생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 한다. 수필 공부방에도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모였다. 불도저가 쓸어가 버린 윌든 호숫가에 기어코 다시 모여 앉은 셈. 무엇을 읽고 무엇을 써야 할까. 아무일 없었단 듯 굴 수는 없는 노릇인데.


없는 살림에도 나중 일을 대비해 필요한 보험을 해약하지 않는 것. 남들이 뭐라 하건 묵묵히 그 납입금을 조금씩 마련해내는 게 문학의 일이 아닐는지.


볕 바른 창가에서 흙만 자꾸 해작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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