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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Mar 21. 2022

전쟁


새 아파트 입주철이었다. 낯선 곳에 낯선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하루에도 여러 번 택배 기사가 문을 두드렸고, 설치 기사들이 집안까지 들어왔다. 새 학기가 한참 지난 후라 여름방학까지 마저 쉬고 유치원에 보내기로 한 딸과 둘만 있는 집이 몹시 넓고 설었다.


오전부터 초인종이 울려 모니터를 보니 할머니 두 분과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우리 애보다 어려 보이는 꼬맹이였는데 떡 접시를 들고 앞서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기는 해도, 어른이 둘이나 있으면서 아이에게 짐을 맡긴 게 마뜩잖았던 나는 얼른 접시를 받아주려고 현관문을 열었다.


물론 그녀들 중 누군가가 아이의 진짜 할머니일 수는 있다. 그러나 서로 인사나 나누자고 온 진짜 이웃은 아니었고, ‘좋은 말씀’ 전하러 왔다고 했으나 그들은 진짜 교인이랄 수도 없다. 종교간 분쟁에 대해서라면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나지만 최소한 사람을, 아이를 선전의 도구로 객체화하라는 교리는 세상에 없을 테니까. 반드시 그래야 하니까.


삼십여 년 전 동시통역이 떠듬떠듬 소식을 전하던 걸프전 이후 또 다시 TV화면에 전쟁이 담긴다. 홍콩 사태, 미얀마 항쟁 만으로도 충분히 가혹한 폭력의 비린내가 산뜻한 봄날 속으로 타전돼 온다. 어릴 적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등장하던 2022년에 총칼로 사람을 찌르고 폭탄을 쏘아대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냉전이라는 말조차도 구식이 돼버린 지금 저토록 노골적이고 비열한 싸움이라니. 나는 도통 실감이 나질 않아 애써 못 본 척도 해본다.


또 아이다. 또 현관문을 벌컥 열고 만다. 인형처럼 예쁜 금발의 다섯 살배기부터 열 살, 열한 살 남녀아이 다섯 명. 이들은 모스크바에 있는 우크라이나 대사관 앞에서 전쟁 반대라고 적힌 포스터와 꽃을 들고 서 있다가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반대’라는 단어의 철자를 불러 주었을 부모 두 명도 함께 호송차에 실렸다. 전시 중에 라이프지 표지사진 같은 낭만을 기대했던 여론은 공분했다. 먼 나라 여론은 그럴 수 있다. 낭만을 기대할 수도 있고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SNS로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들 부모라면 아이들을 전장에 데려가는 짓은 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먼 나라 애 엄마도 알만한 위험에 왜 아이들을 걸고 도박을 했던가.


물론 전쟁에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실천만이 필요할 따름이다. 그 절박함 안에는 상식이나 철학 같은 게 들어설 자리가 없다. 늘 전시적 긴장감과 전투력을 요하는 사이비 종교의 전도 행위도 누군가의 현관문을 열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냐 아니냐로 나뉠 뿐일 것이다. 그 방법이 통한다면 잠시 신앙을 부정하는 척 하는 일마저도 용인될 테니까. 꽃 가지 같은 아이들 손목을 비튼 러시아의 잔혹함을 비난하는 동시에, 나는 그 애들을 프로파간다의 꽃으로 쓴 부모에 대한 개탄도 감출 길이 없다.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는 하나, 아이들은 그런 대접 받아선 옳지 않다.


애초 전쟁에는 품격이 없다. 천박한 목적이나 또는 영예로운 명분씩이나 있다 하더라도 전쟁 그 자체에는 품격이 없다. 어느 진영이든 어떤 사명으로든 품위 있게 싸울 수는 없다. 은유적 표현의 전쟁이 아니라 말 그대로 포탄이 날아들고 육박전이 벌어지는 진짜 전쟁터에서 꽃도, 아이도 적군 아군으로 나눠 무찔러야 할 대상에 다름 아니게 된다.


이 끔찍하고 멍청한 일이 왜 지금에도 벌어져야 하는지. 가습기 살균제가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졌듯, 이제는 아무도 DDT 살충제를 몸에 뿌리는 사람은 없듯, 전쟁이라는 반근대적이고 반생명적인 물건이 왜 아직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도태되지 못한 것일까.


코로나 확진으로 아이들과 일주일 떨어져 지냈다. 바이러스 전쟁에서 패한 자의 생이별. 전쟁이란 고작 이런 비유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 진짜 가족을 전쟁터로 내보내고 헤어지고 잃고 죽음을 맞는 일로서가 아니라.


지난 달 24일 러시아가 침공을 시작한 후 우크라이나 난민이 삼백만 명을 넘어섰다. 이중 미성년자 숫자가 절반이다. 지난 이십일 간 1초에 한 명씩 나라 잃고 떠도는 어린이가 생겨난 것이다. 태반에서 떨어져 나간 아기가 밥보다 온기가 끊겨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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