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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Nov 24. 2021

새벽 창밖



멀리서 보면 인생사 희극이라지. 거실 창 수십 미터 아래에 놓인 오래된 주택들이 장난감처럼 앙증맞다. 외벽 실금이나 창문 찌든 때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다. 저녁 내 잘 갖고 놀다가 가지런히 두고 잠든 아가의 것 같다. 은하수를 덮고 자는 큰 아가는 아직 깨지 않았다.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가 쓰고 멀쩡히 돌려놓아야 할 텐데, 종종 그 염치를 잊고 부수고 뭉개고 아슬아슬 높이 세운 탓으로 이따금 노여움을 사는지도 모르겠다.


골목마다 조그만 자동차가 빼곡하다. 고단했던 바퀴를 괴고 엎드려 누워들 있다. 마땅한 자리가 없어 가로등 불빛을 덮고 노숙한다. 한 몸 누일만한 곳을 찾지 못한 차는 인도 턱이나 경사로에서 불편한 쪽잠을 잔다. 늦게까지 택배 상자를 나르다가 또 아침 일찍 나서야 하는 차. 다행히 그 차의 주인은 오늘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고, 지금쯤 선물상자처럼 반듯한 방에서 통증 없는 숙면에 들었길 바란다.


늙은 집 한 채가 반쯤 허물어진 듯도, 반쯤 일구어진 듯도 한 꼴로 서리를 맞고 있다. 새로이 단장할 그 자리엔 열 잔 마시면 한 잔이 공짜인 카페나 앉을 자리 없이 배달만 하는 음식점 같은 게 들어설 것이다. 원래 살던 노부부가 그 가게의 단골 될만한 곳으로 이사를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지금은 공짜 커피도, 배달치킨집도 너무나 많아서 그 대신으로 사라진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열무단을 손질하던 수돗가와 제철마다 끓어 넘치던 추어국 냄새, 런닝 바람도 흉 될 일 없던 담벼락 이웃. 그런 것들의 서사가 절명해버렸다. 이 감상을 고층건물 창문 너머 멀찍이에서 읊어대는 일은 물색 없는 짓이다.


주택가를 에워싼 아파트에는 여러 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아마도 온전히 어둠에 잠겨본 적 없을 것이다. 건물 꼭대기 아파트 이름을 새겨둔 부분에 밤새 불이 훤하다. 이름표를 목에 건 치매노인 같다. 하늘로 솟을 듯한 풍채지만 한 자리에 우뚝 서서 같은 말만 반복한다. 뿌리 내린 것을 길러내는 땅의 힘이 철심 후벼 판 빌딩까지도 건사하고 있다. 그래서 인가. 아파트 값이 해마다 자라는 것은. 언젠가 지력이 쇠할 것이 두렵고, 자기 이름 잊것이 두려워 아파트들은 야광 이름표를 목에 걸고 밤에도 눕지 못한다.


이마에는 해무가 엉겨 며칠 째 같은 모습이다. 바람결에 풀어지지 못한 채 손오공의 긴고아처럼 단단히 옭아매져 있다. 말도 안되게 바다 가까이, 말도 안되게 너무 높이 주상복합 건물이 올라선 후 안개가 극심해졌다. 관광객이 구름 위의 성이란 제목으로 SNS에 사진을 올릴 동안, 여기서 살아가는 이들은 찐득한 습기에 진저리 친다. 물통 가득 찬 제습기도 빨간 불을 켜고 두통을 앓는다.


희부연 미명 속에 횡단보도가 선명하다. 주택과 아파트 사이,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건물과 바다 사이에 흰색 사다리처럼 놓여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는 일은 멀리서 보아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위태로울 것이다. 자초지종 가릴 새 없이 세월이 전속력으로 달려들고, 걸쳐둔 맞은편 간의 고도가 달라 기우뚱거릴 테며, 한 철만 살고 마는 근시에 눈 흐릴 테니. 해무 때문에도 더 미끄러운 사다리 한가운데서 건너지도 되돌지도 못한 채 조바심으로 출렁거려야 하는 신세가 쓰고 떫다. 새벽에 눈 떠졌다 도로 잠들지 못한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늠할 수 없고, 그렇다고 안온한 온기 속을 파고들며 아무것도 모르는 듯 어리광을 부릴 수도 없다. 하늘 찌르도록 높이 세운 바벨탑 같은 곳에서 아랫집 천장에 발을 딛고 위층을 머리에 인 채 곡예 노릇을 하는 내가 무슨 수로 그 일리를 재단할 것인가.


서로 밤 인사를 나누고 나란히 잠든 현수막들이 아침이면 다시 옥신각신 큰소리로 펄럭일 것이다. 재개발을 하자는 문구와 그래선 안 된다는 글귀가 골목마다 부딪쳐 윙윙거린다. 산책길이나 삼으면 좋을 그 골목에도 세금 고지서가 날아들고 생수 묶음이 계단을 오르며 배달되고 긁지 않은 복권 같은 희망이 기웃거리므로 나의 감상은 일말의 기척도 낼 자격이 없다. 그저 새벽이라서, 창 밖이라서 나는 한숨을 조금 몰아 쉬었을 뿐이다. 마치 땅들의 삶을 가엽게 여기는 어름사니인 양.


아침이면 안개의 결박이 조금 느슨해지려는가. 창문을 열고 사과를 씻어야지. 해마다 사과 값이 오른다. 이상기후로 인해 재배지가 점점 좁아지다가 종내는 사라질 것이다. 이 귀한 맛을 잊지 말고 잃지 말라고 아이들 혀에 사과를 심어두련다.


공기 중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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