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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Feb 23. 2022

소리 끓다


토독. 허리 춤에서 소리 하나 떨어져 나온다. 아까 차에서 다 털어낸 줄 알았는데 어딘가 끼어 있었던 모양이다. 소음 밭을 뒹굴다 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운동하는 곳은 시끄러운 소리들로 범벅이다. 우선은 빠른 비트의 음악이 쉴새 없다. 그 음악에 맞춰 쿵쾅쿵쾅 걷고 달리는 소리, 커다란 기구에 매달린 추가 절그덕대며 오르내리는 소리. 바벨 무게 못 견뎌 바닥에 던지다시피 내려놓는 소리, 덧붙는 사람들 신음소리, 그럴수록 커지는 트레이너 구령소리로 어느 한 구석 빼꼼한 틈이 없다. 짧고 얇은 옷 한 장씩을 위 아래로 걸친 몸에 소리들이 엉겨 붙는다. 오늘따라 아령이 무겁고, 묵직한 소리 뭉치까지 끌어올리느라 더 버겁다. 때론 그 소리에 떠밀려 스쾃 남은 세 개가 억지로 해내지기도 한다. 세트 마지막엔 너나없이 고통과 생색을 가득 담은 파열음을 쏟아낸다. 그 소리가 보내져 실내는 북덕북덕 소음으로 끓어 넘친다.


음계 없는 마음속 소리는 더 야단이다. 해 보자는 소리, 말자는 소리, 죽겠다는 소리에 무섭다는 소리까지 아우성이다. 독한 선생 원망하는 소리는 땀방울 피켓이 되어 마지막까지 시위를 하다가 바깥 바람에 증발해버리고 만다. 못하겠단 소리 또한 마치고 떠나는 뒤통수에까지 와 닿는 우렁찬 작별인사에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이틀 후 다시 와서 부글부글 야단이더라도.


더운 몸으로 돌아가는 내 안에 전혀 새로운 소리들이 다시금 차오른다. 뼈 사이, 힘줄 사이 울끈불끈 힘 오르는 소리다.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는 높고 명랑한 소리 또한 또렷하다. 하나를 해냈으니 다른 것도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긍의 소리. 아직 어린 아이들 앞에 든든해야 할 부모의 소임 중 일부를 거뜬히 이룬 듯한 자축의 소리 같은 것 말이다. 그 소리가 청각을 건드리며 밖으로 나올 일은 좀체 없지만, 내 안에서 어떤 옹찬 기운으로 전환되어 동력으로 쓰이곤 한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글을 써내는 에너지와 영감으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 하지 않아도 되는 근성으로 말이다.


심장 소리가 편안하게 돌아오고 마침내 사위가 고요해졌다. 요동치던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도 얌전해진 집필실 책상 위. 비닐 커버가 씌워져 부드러운 타격음을 내는 키보드 말고는 소리 내는 것이 없다. 한 문장이 끝난 뒤에 한 문단이 새 행을 시작하는 엔터 소리를 낸다. 이따금 백스페이스 버튼이 탐탁치 않은 부분을 지우느라 타다 타닥 신경질을 낸다. 그런 뒤 다시 메우는 소리가 이어 들려야 하는데, 머쓱한 정적만이 마른 세수를 해댈 때 나는 습관처럼 창밖이나 내다본다.


저 건너에서 포기란 걸 모르는 파도가 오늘도 뿔 넷 달린 거대한 테트라포드에 맞서고 있다. 미련 맞고도 비장하여 말릴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들이박고 부서지고 또 달려와 산산조각 깨져 나간다. 대오를 갖춰 다시 밀어붙이는 저 우직한 소명은 어깨 절로 들썩이게 하는 180비트의 빠른 음악 없이도, 격려하고 다그치는 트레이너 구령 없이도 한결 같기만 하다. 제 몸 부서지는 소리를 음악 삼고, 다시 합쳐지는 소리로 기합 대신 하리라. 언젠가 바다 코 앞에 서서 그 소리 듣겠다. 어떤 정적은 폭음보다 압도적이어서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도 만드니, 조만간 나는 채근하는 이 고요를 못 이겨 소리 뒤집어쓰러 저 바다 앞으로 뛰쳐나가지 싶다.


깜짝, 알람이 울린다. 아이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다. 둘째를 마중 나가 오늘은 뭘 하고 놀았는지 묻고 답할 시간. 이른 저녁을 차려 큰애 먹여서 학원 보낼 시간. 숨바꼭질을 하고, 남편과 한담을 나누고, 펄럭펄럭 빨래를 털어 널고, 요란하게 설거지할 소리들을 일궈낼 차례다. 온종일 꼭꼭 채워 넣은 내 안의 소리을 풀어내 활기로 펼친다. 죽음 같은 잠에 빠질 때까지 소리를 꺼내 쓰는 일은 운명일 것이다. 텅 빈 하품조차도 닥닥 긁어내 밖으로 부려놓아야 직성이 풀리지 않던가.


생은 소리 안에 있다. 또는 소리는 생 안에 있다. 북덕북덕, 생이 끓는다. 소리가 끓는 일이기도 하다. 좋은 냄새도 난다. 그렇지 않던 배까지 고프게 만드는 냄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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