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줄 알았다'는 말만큼 맥 빠지고 약아 빠진 말이 있을까. 실컷 탈이 난 뒤에 이렇게 한 마디 쏘아붙이는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참말로 그럴 줄 미리 알았다면 미연에 방지하고 조치했으면 될 일이다. 근 일년 만에 다시 시작한 요가 수업 중에 오른팔 인대가 늘어나고서 내가 한 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줄 알았다!" 였다.
운동 일주일 만에 공중에 매달리는 고난도 동작은 무리였다. 누가 봐도 알겠고, 지나 보니 알겠는데 그때는 앞선 의욕이 눈을 가렸다. 기초 체력을 올리는 일은 밀린 숙제 하듯 해치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건강에는 벼락부자가 없는 법이거늘.
깁스한 오른팔을 낫처럼 꺾어 맨 꼴로는 도대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밥 먹고 세수하고 청소기 돌리는 일은 물론이고, 평소 이 손 저 손 번갈아 가며 잘 했던 동작들도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포크질을 허둥대느라 식탁에는 나만 남았고, 빨래라도 널라치면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다. 남편이 한 청소는 맘에 들지 않았고, 매번 도와달라기도 적성에 안 맞았다. 통증으로 잠까지 설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긴 병에 효자 없고 성인군자도 없다. 예민해진 환자를 달래고 돕는 일은 고되지만, 아픈 당사자의 불편은 불만과 불안에 이른다. 이기적이 되고 근시안이 되며 자존감마저 떨어지더라.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이력에 흠집이 났다 싶으니 그 다음부터는 이미 버린 몸, 에라 모르겠다 심리도 발동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어디 헬스장 광고로만 유효할 것인가.
인심에는 밑천이 필요하다. 미소를 띄울 여유, 인사를 나눌 근력, 버릇 들인 배려가 미리미리 쌓여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산들은 수확 철이 따로 없고 흉 풍년이 따로 없다. 스스로 행복하다, 행운이다 같은 만족감을 공들여 키워 얻는 것이고, 자연재해처럼 부지불식 찾아 드는 시련으로 거덜났을 때 다시금 성실히 메워놔야 되는 것이다. 당장 비참하여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아도 이 자기 존중의 씨감자 만큼은 온전히 보존하여 근면하게 파종해야 한다. 이 건강하고 여유로운 마음의 곳간이 차고 넘칠 때에야 비로소 옆 사람의 축 처진 어깨에 눈길이라도 가 닿을 수 있다.
만족이라는 뜻은 모자람 없이 충분하고 넉넉하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고 사람마다 달라 비교할 것도 없다. 나 스스로 모자라지 않다고 느끼면 되는 것. 누군가에게는 배에 새겨진 王자 복근이 만족일지 몰라도, 내게는 주말 낮잠 대신 산책 나설 활력만 있어도 족하다. 손가락 가득 번쩍이는 유색 보석 대신 냉장고 가득 채운 유기농 먹거리로 호사부리는 편이 내게는 값지다. 가진 것은 가져서 행복하고 못 가진 것은 못 가진 덕에 골치 썩을 일 없어 다행이다. 그래도 굳이 갖고 싶다면 희망을 갖고 부지런을 떨어서 삶의 생기를 북돋을 수 있다 생각하면 내 곳간이 텅 비어서 인심 베풀 여유가 없다는 얘기는 핑계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만 인대가 늘어나 만사가 고통인 것은 예외로 쳐주시길.
깁스를 떼고 나자 나는 좋은 아내의 미쁜 짓을 되찾았다. 좋은 엄마의 우아한 모습도 회복했다. 왠지 모를 억울함, 심술, 근심이 사라졌고 때마침 비바람에도 만개한 꽃나무마저 눈물겨웠다. 인심을 '사람 마음'이라 부르는 이유도 내가 건강한 사람으로서 행하는 모름지기 사람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씩 운동하고, 조금 넓고 멀리 생각하고, 내 할 일 기쁘게 해내며 자존감을 단단히 챙겨두는 일은, 그러므로 가장 사람답게 사는 것의 기초다. 이 곳간이 가득 차면 인심은 절로 행해진다. 나 홀로 살거나, 한 철을 살고 마는 것이 아닌 인간의 도와 덕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럴 줄 알았던 일이 벌어지기 전에 다들 운동하시길. 내 체지방 한 움큼 줄어들면 내 곳간에 한 포대기의 자신감이 쌓인다. 상대를 막론하고 우선 건네고 보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인사 한 마디에 내 곳간에 평화 한 줌이 쌓인다. 모두의 곳간이 가득 차는 태평성대의 미래를 우리 자신과 아이들에게 선물하는 것 또한 어른 사람의 도리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