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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Dec 15. 2021

3년 적금


자료 조사에 나선 만화가가 어느 바리스타에게 물었다.


커피 만화를 그리려는데 공부를 얼마나 하면 될까요? “글쎄요. 한 삼 년 정도는 하셔야…”

아니, 그렇게나 오래요? “아무 것도 안 해도 3년은 지나가는 걸요.”


뭐든 일단 시작만 하면, 그래서 흘러가는 세월에 띄워 놓기만 하면 어느 샌가 3년차도 될 수 있고, 뭔가 해볼 만해지겠지 하여 나는 펜싱을 시작했다.


대부분이 그러하듯 칼로 누군가를 찔러본 경험은 없고, 사실 이렇다 할 싸움은커녕 말다툼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다. 애정 어린 잔소리랍시고 큰애한테 언성이나 높이는 게 전부고, 그마저도 심장이 벌렁대서 이내 놀란 내 마음부터 추스려야 한다. 운동신경이 좋은 것도 아니고 체력마저 빈약하여 주말 이틀간 근력운동을 쉬면 다음날 벌써 이두근에 맥이 풀려있다. 어려서부터 심장이 약하고 B형 간염 항체가 생기질 않아 체육시간이면 벤치 신세를 지던 내가, 이십 대 어느 날 불쑥 항체가 생겨난 것이 반갑고 소중해 운동을 습관화하려는 것은 일종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함일 것이다.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공격하고 제압하는 운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마흔 중반의 애 엄마가 킥복싱이나 무에타이 같은 걸 하다가 다리 뼈라도 부러지면 우리 둘째 기저귀는 누가 갈아준단 말인가. 게다가 피 터지고 멍 드는 스포츠는 TV로 힐끔 보는 것만도 질색이었다. 그렇게 조신한 삶, 안전한 삶에 인이 배일수록 통쾌하게 휘몰아치는 액션 한 방이 아쉬웠다. 한계치까지 밀어붙이는 자신과의 싸움도 의미 있지만, 룰과 예의를 갖춰 힘과 기술을 다투는 대련 속에는 분명 순수하다 못해 순진한 열정이 가득할 것이었다. 그 속에서 자존감과 겸허함을 높이는 일은 빠르고 단순하여 쉬울 것 같았다.


우연히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펜싱 칼을 보자마자 나는 오래 전에 잃어버렸지만 평소 쓸 일이 없어 불편하지는 않아도 때때로 마음 찜찜하던 귀중품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그 길로 이웃 주민이 개원했다는 펜싱 클럽에 등록을 했다. 일주일에 두 번, 기본 동작을 모두 배운 나는 앞으로 2년 9개월 후 플뢰레 3년차가 될 것이다.


수업은 낯설고 재밌다. 그리고 초인이라도 된 듯 흥분된다. 1미터의 날렵한 칼을 앞으로 쭉 뻗으면 내 몸이 그만큼 확장된 듯 느껴진다. 어깨 너비로 벌려 무릎을 약간 굽힌 하체에는 안정적이고 단단한 힘이 실린다. 상대의 가슴팍을 찌를 땐 다리 간격을 넓혀 한쪽 다리를 내뻗는데다 칼을 쥐지 않은 손까지 펼치기 때문에 내 물리력의 반경은 훨씬 넓어진다.


활짝 열어 휘두르는 몸. 이제껏 살아온 방식이 아니다. 출근길 지하철 안이 아니어도, 시댁 식구나 애들 선생님 앞이 아니어도 가지런한 몸가짐을 미덕으로 하는 그런 방식이 전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젖가슴 출렁대며 뛰는 것을 주저해왔다. 하이힐이나 뒷축 없는 신으로는 힘차게 걷기만도 어렵다. 그러던 내가 매끈한 피스트 위에서 두 발을 군더더기 없이 감싸는 펜싱화를 신고 온몸을 활짝 펼쳐 달린다. 팽팽히 잡아당겼다가 화살처럼 튕겨 나가기도 하고 앞뒤로 재빠르게 이동하며 찌르고 막는다. 챙 챙! 칼 닿는 소리가 청량하다. 코치님 운동복 안 플라스틱 가슴 보호대에 칼끝이 부딪치는 그 살벌한 소리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품위없이 헐떡이며 찬물을 들이키는 일도 그렇다. 가랑이를 벌리고 서서 누군가를 공격하는데 집중이 된 내 모습을 전신거울에서 발견하는 일도 이제 놀랍지 않다.


직장생활 첫 3년이면 대개 승진이란 걸 하게 된다. 회사에서나 밖에서나 그저 아무개 씨로 불리던 신입사원에게 직함이 붙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이름이 달라진다. 모 대리, 모 계장, 모 주임. 카톨릭에서 교리 공부 끝에 세례를 받고 새 이름으로 불리며 새 삶을 살아가는 일과 닮았다. 그는 이제 새 이름에 걸맞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3년만에 이뤄낸 쾌거다. 3년 전의 패기와 결심에 그간의 성실이 붙고 꼬박꼬박 행운의 이자까지 붙어 비로소 만기를 맞이한 셈이다.


이제껏 전혀 해보지 않았던 일, 평생 나와는 상관없을 거라 여겼던 일, 공부, 습관에 도전한다는 것은 내 삶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일이리라. 아파트 평수를 넓히고 자동차 배기량을 키우고 소모품의 기능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사뭇 위대해 보이고 용맹해 보이는 이 일도 난데없고 서투르던 첫 날로부터 시작된다. 슬그머니 석 달을 이어가면 백일잔치를 열어줄 만 하고, 하다 보니 일년을 채우거든 돌잔치로 자축할 만 하다. 그러다가 3년이 되면,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그 3년 뒤에는 제 것인 양 익숙해진 노련함이 남고, 그로 인해 확장된 세계를 떳떳이 누리게 될 것이다.


만기일이란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 아니던가. (2019년)


*코로나로 닫힌 클럽 문이 곧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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