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런아란 Mar 15. 2022

소란하게


산 것에서는 소리가 난다. 죽어라 사느라 그렇다. 산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먼지를 일으키고 서로를 밀거나 잡아 당긴다. 차분히 확정된 죽음 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소란스럽다. 서툴고 우왕좌왕하지만 그것은 삶이 분기탱천하여 그런 것이므로, 아기가 걷기 위해 자꾸 넘어지고 다시 서는 것을 누구도 어수선하다 나무라지 않는다.


오늘도 아이들은 부산하다. 처음 본 눈이 반가워 길가에 잿빛으로 쌓인 얼음덩이를 긁어댄다. 모래 더미에 팔을 묻고 성을 쌓는다. 걸음마다 채이는 돌멩이를 비틀어 꺼내고, 같은 나무 같은 꽃을 보러 멀리까지 뛰어간다. 난간을 보면 괜히 올랐다가 도로 내려온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도 결국 한 자리에서 만날 건데 거슬러 달려와 내 옆에 선다. 그러다 또 주위를 밀거나 당기거나 하면서 주체할 수 없는 산 것들이 펄떡거린다. 직선 길을 최단거리로 곧게 걷는 이는 나 뿐이다.


다리가 짧아 더 걷고, 기웃대느라 더 걸은 몸이 출구를 앞에 두고도 떠나기 아쉬워 에워간다. 세상은 이런 순정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런 애정, 이런 열정으로 같은 자리를 또 돌고 또 쓰다듬고 또 헤집다가 새로운 것이 창조되곤 했다. 효율적이니 상식적이니 하는 것들로는 열리지 않는 새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조금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산 허리를 뚫어 터널을 내곤 한다. 그렇게 삼십 분을 벌어서 우리는 어디에 썼던가. 삼십 분 더 일찍 집에 도착해 쉴 수 있었던가, 아니면 그만큼 더 일을 했던가. 삶터를 잃은 동식물이 생태 피라미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보고서를 썼던가. 길거리 쓰레기를 주우면서 달리는 플로깅 동호회 활동할 여가를 만들었던가.


최단거리 철로를 달려온 기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기백 명, 하루 여러 대 기천 명. 모두가 삼십 분씩 벌어낸 시간들을 한데 모아 작은 모래알 하나라도 만들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산 것들 곁을 지키고 보살피는 진짜 모래. 이 땅에 사람보다 훨씬 먼저 살아왔고, 사람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살아갈 모래.


손톱 밑은 흙 모래로 가득해도 아이 손등은 맑고 보드랍다. 살살 핥으면 녹아 없어질 듯하다. 산 것은 이토록 촉촉하고 무르다. 무른 것은 만지는 대로 모양이 달라질까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다시 만져 바르게 바로잡을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사탕 껍질을 아직 혼자 못 까서 엄마 몰래 먹을 재간도 없는 녀석들이 결국엔 세상을 바로 만져 옳게 만들리라 나는 믿고 있다. 효율적이지 않아도 되고 빠르지 않아도 된다. 누구보다 아이들이 그걸 제일 잘 안다.


십오 년 전 장바구니를 들고 다닐 땐 당장 내 친구들부터도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왜 그런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일을 하느냐고. 이제는 더 번거롭거나 더 비싸거나 더 느리더라도 생태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일주일간 섭취하는 미세플라스틱 양이 신용카드 한 장 수준을 넘어섰다. 이상기후로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해 2030년이면 인천과 부산 일대가 물에 잠긴다 한다.


케첩 한 통을 다 먹어서 뚜껑까지 깨끗이 씻어 헹군다. 플라스틱 용기에 붙은 라벨 스티커를 떼려는데 아무리 물에 불리고 스펀지로 밀어내도 말끔하니 떨어지질 않는다. 손톱으로 일일이 긁다가 얼굴화장 지우는 클렌저까지 내온다. 소란한 가운데 아이들이 말한다. “엄마, 이제 이 케첩은 사지 말자!”


그렇다. 케첩이 아무리 맛있건, 유기농 설탕을 썼건, 믿을만한 회사건, 용기 디자인이 아름답건 분리수거가 어려운 상품은 퇴출되어야 옳은 것이다. 아이들이 그렇게 만든다. 유난스럽게 챙기는 일, 소란스럽게 분주한 일. 산 것이 살자고 하는 일이고, 지치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이다.


큰애가 친구들과 해변가 쓰레기를 줍겠다고 나선다. 손 조심하라고 장갑 챙겨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