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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Nov 26. 2021

불멸의 대가


단언컨데, 불멸은 벌이다. 반백 년도 안 살고 불멸을 논하는 것도 우스운데 대뜸 흠부터 잡고 늘어지는 나도 참 어지간하다.


그래도 나는 건방지게 살다가 후회든 해탈이든과 함께 이 한몸 소멸할 것이므로 나의 건방은 누적되지 않고, 영생하지 않고, 후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지 않는다. 내게는 개운하게 멸할 특권이 있고 한정판이어서 더 값진 생이 있다. 이런 유한함이 없다면 대차게 헤어지고도 각자의 버스가 오지 않아 난감하게 마주 선 눈물범벅의, 또는 씩씩거리는 연인마냥 민망할 일도 잦을 것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오게 한 것도 태평성대와 무소불위 구축을 위해 시간이나 좀 벌어볼 심산이었지, 볼 꼴 못 볼꼴 다 봐가며 수 세기를 견딜 각오까지 한 건 아닐 것이다. 정정한 몸과 정신, 동년배보다 좀더 뛰어난 활력 정도를 원하는 것이지 조금도 삭지 않는 육체란 오히려 재앙에 가까우리라.


미국이나 유럽에서 가끔 악질 범죄자에게 징역 기백 년 형을 판결하는 것도 이런 재앙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후회와 분노, 낙담과 싸구려 기대가 뒤엉킨 채 살아보라고 말이다. 죽지도 못하고 죽어서도 안 되는, 긴 세월 고통 받고 후회해야 하는 극형. 형 중에 육체가 소멸하더라도 남은 죄가 탕감되지 못하는, 타협 없는 경고가 아닐까.


희망이 없어서 ‘이생망’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고난 천성을 못 고치고 환경을 못 바꿔서, 또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 앞에서 이번 생은 망했노라 탄식한다. 생을 다 건 자조적인 얘기지만 한편으로 생이란 언젠가 멸하고 언제나 또 움트는 법이어서 다음 생, 다음 기회를 바라는 간절함으로도 들린다. 단물이 제대로 들지 못한 사과 알도 수확이라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더 충만한 다음 생을 노릴지 모른다. 개체 하나 하나의 다음 생이란 불확실하여 무의미하나 자연계 전체가 새로운 생들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모두가 겪어 안다. 종말의 그날에도 사과나무에 새 사과가 달려 있을 것임을.


검질긴 생 전체를 하루 소풍에 비한 시인도 있다. 한국인의 금언이 돼버린 이 비유 덕인지 어릴 때부터 소풍 참 열심히 다녔는데 올해는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귀천>이라는 시가 발표된 지 고작 반백 년 넘기고 벌어진 일이다. 그 사이 코로나라는 빙하기가 시작돼 일상 속 흔하던 것들이 산 채로 얼어붙을 줄이야. 한결같다, 여전하다는 말이 천지개벽하다는 말보다 쇼킹한 단어가 될 지경이다.


영생하지 못하는 것은 바이러스도 마찬가지겠거니 하며 기다린다. 알록달록 도시락 싸느라 부산스럽던 아침. 삶은 메추리알에 검정깨로 눈 붙이고 당근으로 볏 모양 만들어 달던 날이 다시 돌아오기를, 아무것도 몰라서 천연한 아이처럼 시치미 뚝 떼고 기다려본다.


유한함이란 것이 알뜰과 겸허를 불러 들이기도 하지만 포기나 허무와도 가까워 안타깝다. 나의 유한은 내 아이들의 유한에 꼬리 물려 어정쩡한 영생의 꼴을 하고 있으니 누군가의 포기나 허무가 일을 그르칠까 두렵다. 택배 상자에 붙은 비닐테이프 조각을 아득바득 뜯어내면서, 기름 묻은 스티로폼 접시를 말끔히 씻어 재활용함에 간수하면서 나는 천 년을 살 것처럼 조바심 낸다. 한 해를 살고 마는 화전민이 아니고서야 불 타는 아마존 삼림을 보는 일은 가슴 치는 탄식이다. 영생은커녕 그것을 상상하고 대비하는 것만도 죗값 치르듯 고통스럽다. 이처럼 오금 저리고 이처럼 애가 타서 부지런 떨고 때론 싸우고 사정도 해야 하는 일이다. 단언컨데 불멸은 벌이래도.


지난 계절 끝자락에 청경채 씨앗을 심었는데 파는 것처럼 통통하진 않아도 고기 볶을 때 뜯어 넣을 정도로는 자랐다. 그렇게 불고기 덮밥을 해서 보온 통에 담고, 사과를 토끼 모양으로 껍질 남겨 깎아야겠다. 컴퓨터 모니터 안에 갇힌 친구 대신 엄마가 함께 거실에 돗자리 펴고 앉아서 아이와 도시락을 까먹어야지. 무한의 우주에서 유한의 우리가 이 꼴 저 꼴 다 보며 일희일비하기가 고되다. 그럴 때는 소풍 도시락만한 게 없으니 한끼 즐겁게 먹고 산뜻하게 일어서는 연습을 하는 거다. 앉은 자리 어지르지 말고 다시 올 것 염두 하지 말고 처음처럼 정연하게 떠나기가 관건이다.


아쉬움 많은 오늘을 넘어 내일을 사는 축복을 얻었으니 불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장생의 기적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셈. 그 대가로 지치지 않고 희망하는 것,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 끈질지게 고치고 바꾸는 것으로 값을 치러야 한다.


이런 벌조차도 받을 수 없는 절대 무의 지경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서 사람들이 천국이라고도 하고 지옥이라고도 하며 갈팡질팡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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