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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Mar 04. 2022

뚝딱


한 그릇 또 뚝딱이다. 있었는데 사라지는 마술처럼, 아이들 밥 그릇 비우는 일에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는 표현이 쓰일 만도 하다.


방금은 사실 차리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제 해 둔 찰밥과 김치찌개를 데우면서 달걀 후라이나 몇 개 했다. 매운 걸 아직 못 먹는 둘째를 위해서는 달걀 지단을 만들어 냉동 볶음밥을 멍석처럼 말아냈다. 냉장고 반찬 몇 개 꺼내고, 오무라이스 위에 케첩으로 하트 그려 넣는 시간까지 합해 봤자 십여 분이나 될까. 그래도 먹는 시간이 항상 더 금방이다.


밥술 놓고도 괜히 지범거린 멸치볶음을 우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먹은 거에 비해 설거지거리는 늘 많다 싶은데, 여기 저기 나눠주느라 큰 솥 가득 끓인 냄비가 벌써 싱크대 한 짐이다. 돼지 기름까지 낀 벌건 솥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한숨이라도 쉬었나 보다. 식탁 위를 정리하던 큰애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우리가 너무 빨리 먹어서 허무하냐고, 다음에는 이야기라도 많이 하면서 천천히 먹을까? 한다. 허무할 게 있나. 맛나게 먹어주니 늘 고마울 따름이다. 다만, 먹고 사는 일의 무게가 이 솥만큼 묵직하여 나는 수세미를 손에 든 채 가끔씩 아득해지곤 한다.


장을 봐와서 재료를 다듬고 육수를 뽑고 간 맞춰 익혀내는 일 이전에 그 밥을 버는 일부터 생각해야 옳겠지. 유기농 매장에서 가격표를 보지 않고 좋은 쌀을 고르는 일. 국물 한 술에 고기 한 점 들도록 앞다리살을 양껏 주문하는 일. 그 일에는 남편이 입에 단내가 나도록 통화를 하고 회의를 하는 수고가 들어가 있다. 서울로, 광주로, 대구로, 하늘 길이 막힌 지금에도 바쁜 남편의 출장 가방이 거기에 있다.


통통한 쌀알이 여기까지 온 일을 생각하면 더욱 아득해진다. 땡볕이 쏟아지기 전 새벽부터 몸을 놀리고, 가까운 외출 잠깐에도 마음 편치 못했던 농부의 삶. 내 친구가 농부라서 나도 안다. 저 달걀이 가지런히 열 알씩 담겨 우리 집 냉장고에 예사로 놓이기까지는 아빠는 없는 셈치고 자란 삼남매의 쓸쓸함도 들어있다는 것을. 노른자가 선명한 유정란을, 우리는 늘 흰자만 살짝 익혀 밥 위에 올려 먹는다. 그 충만한 고소함에는 슬프거나 모자란 것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기에 애쓰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무사히 일주일이 흘렀다. 간단히 먹는 아침을 제하고도 열네 끼의 밥상이 무사히 차려졌다 달게 사라졌다. 뚝딱. 마술처럼 묘연하다. 그 무거웠던 찌개 솥도 멀끔하게 씻겨 반반한 허기를 드러내 보인다. 또 그 한 가득을 채웠다 없애는 마법 같은 일상이 계속될 것이다.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기 전부터도 한솥밥 식구들이 염려돼 거처를 옮긴 남편이 내일이면 집에 돌아온다. 일주일 자가 격리 처분을 받은 아이들은 내일부터면 집을 나갈 수 있다. 매일 두 끼씩 도시락과 간식거리, 커피를 내려 담고 칸칸이 과일 통까지 챙겨 남편 묵는 집필실 앞에다 내려놓고 가던 나의 두 집 살림도 오늘로 끝났다.


점심시간 맞춰 뜨신 밥을 지어 가면 문 밖에는 남편이 씻어내 논 전날의 그릇들이 가지런했다. 삼겹살 기름도 없고, 무말랭이 고춧가루도 묻지 않은 말간 접시가 나는 어쩐지 눈물겨웠다. 노고가 뭔지 모르고, 바이러스가 뭔지도 모르는 달걀 노른자처럼 해사하고 영롱하기만 한 것이. 내 기척을 들은 남편이 문 안에서 인사를 건넨다. 고마워. 잘 먹을게.


잘 먹어줘서 고마운 가족들이 마침내 한 식탁에 마주하는 날, 대합을 볶아 미역국을 끓일까, 매생이를 풀어 떡국을 끓일까. 무엇을 차려내도 한끼 또 뚝딱할 것이다. 아직도 뜨듯할 밥그릇 국그릇 네 개씩과 수저 네 벌, 접시들과 냄비를 씻어 건조대에 엎어 놓아야 나는 비로소 이 천연한 마술 쇼를 온전히 끝낸 기분이 들 것 같다. 밥이 건강히 우리에게 와서 내 가족을 살리고 사라지는 마술. 이토록 신비롭고 감격스러운 하이라이트를 위해서라면 준비하는 몇 시간의 수고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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