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런아란 Nov 22. 2021

글 몰라도 시인인 자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라는 책이 있다. 가난해서, 딸이라서, 나다니기 무서운 시절이어서 한글을 깨치지 못한 할머니들이 뒤늦게 글 쓰고 그림 그린 것을 엮은 책이다. 이른바 ‘할매 덕후’인 나에게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


어린 날 미처 배우지 못한 이가 책 속 스무 명의 순천댁뿐이랴. 글 모르고 셈 몰라서 당한 불편과 불이익이 자심한 순서대로 만학에 도전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해냈다. 운 좋게도 가까이에 인프라가 있었고, 근성 있는 기획자와 왕복 여섯 시간 길을 오가준 스승들이 있었으니까. 더 광범위하게는 할머니들의 투박하고 신산한 사연에 귀 기울여준 사회정서상의 여유 덕도 있을 것이다. 그땐 다 그랬는데 이제와 유난 떠는 것 아닌가 움츠리지 않아도 되었다. 손주와 손주뻘들이, 페미니스트나 인문학도, 또는 아이 키우는 엄마 아빠들이 그녀들을 격려했고 환호했다. 이들은 작품 전시회에 찾아가고 책을 소장했다. 이런 것도 작품이 되려나, 하는 질문에 됩니다 되어야지요 해준 리액션 덕에 할매들은 더욱 용기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배경이다. 큐레이팅이니 마케팅까지도 필요 없는 2차원 평면에 납작하게 놓인 환경에 불과하다. 이 지점에서 높이와 두께, 질감과 미향을 뽐내는 컨텐츠로 우뚝 솟아오르는 것은 작가 개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다. 모든 갸륵한 도전이 늘 기막힌 성과로 답해오진 않는다. 어려워 포기하거나 시들해 관둔 이도 여럿일 것이다. 원리를 깨닫고 창의를 누적해 성취와 재미를 눈덩이처럼 불려간 이에게는 그만의 동력이 분명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 마음 안에 옹차게 들어있던 저력. 한글을 알건 모르건 이미 시인이요 화가였던 그녀 마음 안의 종자돈.


이 책의 첫 글에서 나는 그 비상금 뭉치를 발견한다. 훗날 인플레이션한 세상에 내놓았을 때 어마한 달란트 목돈이 되어준 그것 말이다.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 아버지는 4남2녀 중 맏이였던 그녀를 학교에 보내지는 못했지만 아픈 엄마 대신해 만든 첫 두루마기를 칭찬해 주었다. 열두 살 배기의 얼기설기한 솜씨에도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칭찬을 안겨준 그 사랑이 그녀 가슴 속 씨앗으로 힘차게 뿌리내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아버지의 가슴에는 또 뭐가 있었는지 몰라도 자기 대신 버거운 노동을 도맡던 아내의 사고는 절망 자체였으리라. 부모의 양손이 다 동원돼도 모자랄 육남매 건사에 아내 팔 하나를 잃게 되었으니 그 막막함이 가학적 자포자기로 이어진대도 놀랍지 않을 클리셰건만, 아버지는 장녀를 보듬고 토닥이는 것으로 비극의 첫 날을 시작했다. 그 뒤의 나날은 아마 한 치의 여지없이 고단하게만 흘러갈 것임에도 말이다.


그녀가 굳건히 살아남아 나이 여든을 넘겨 글짓기를 해낸 것은 밥 짓고 옷 짓던 몸의 경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녀가 황량한 백지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한 자 한 자 획들을 눌러가며 사유의 시접을 접고, 비하와 자족 사이를 뭉근하게 공굴리기 할 수 있었던 건 어린 날 두루막 짓던 이력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꺼질 듯한 호롱불 앞에서 바느질하는 딸아이의 찡그린 미간을 안쓰러이 바라보던 아버지. 봉숭아꽃 같은 우리 애기 이마에 주름지면 어쩌누 하며 쓰다듬어주시던 손길이 그녀 마음 속 씨앗을 자라게 했으리라. 훗날 여럿을 감동시키고 그 자신부터 행복하게 해준 따스한 문장과 그림을 열매 맺게 한 힘 말이다.


책에 소개된 모든 그녀들에게 이런 아버지가 계셨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엄마 가신 뒤 폭음으로 버티는 아버지일지언정 객사할까 마음 졸인 장녀도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요동치는 세월 속에 붙잡고 버틴 나무가 있었을 것이다. 마음에 씨앗 내려 악착 같은 희망으로 키운, 지쳐 점멸하는 기운을 일으켜 세운 잎들의 바람소리 우렁한.


그 나무를 찾아낼 수 있고, 그 꼴과 속을 간파할 수 있다면 나는 뒤늦게 두루마기 짓는다고 법석 부리지 않고도 용기 내어 다음 걸음 내딛을 수 있으리라. 내가 걷고 내 딸들을 걷게 할 이 길에 꽃나무 과실나무 그늘나무 기댐나무를 심고 가꾸면 되니까.


적어도 나는 글 하나를 썼다. 할머니 나무의 우뚝한 그 향에 취해, 그 바람에 일렁여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마음으로 감상문을 남긴다. 보라. 한 걸음 또 와지지 않았는가.

작가의 이전글 노래가 되지 못한 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