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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Nov 29. 2021

글 쓸 나이

마흔 앞둔 그 해에


수필을 써도 되는 나이가 넉 달 남았다. 수필이 나를 쓸 만하다 할 때가 넉 달 앞으로 다가왔다. 퇴고마다 맞닥뜨리는 침통함을 달래줄 떳떳한 위로가 이제 겨우 넉 달치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서른여섯 살 이전에만 해도 이 핑계를 이렇게 오래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일찍이 금아 선생께서 수필은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 하였기에 공부랍시고 풀썩거리며 다녀도 재미만 좋았다. 아직 부끄러움이 태어나기 전인 에덴동산에서의 천진함이랄까. 칭찬을 받아도 신났고 야단을 맞아도 주눅들 게 없었다. 재주 없는 골퍼라도 구력 무시 못한다고, 야무지게 세월만 챙겨두면 연륜이란 게 쌓이고 노하우라는 게 생기리라 태평이었다.


서른여섯이 중년이라기에 너무 이르다며 슬쩍 마흔으로 미루어 유예기간을 벌었음에도 나는 아직 평균 타수가 나오지 않는 엉터리 골퍼다. 어떤 날은 버디를 잡고 득의양양 하였다가 어떤 날은 공이 어디로 날아갔는지조차 몰라 풀숲만 헤치다 집에 온다.


글감을 고를 때도 약아졌다. 편하게 쓸 수 있는 소재를 찾다가 뻔하게 써지기가 일쑤다. 컴퓨터 모니터 속 커서가 깜박깜박 재촉을 해도 도통 빈칸을 채우지 못해 덮어버리곤 한다. 나중에야 어찌되더라도 조갈난 듯 써 내려가던 문단이 가다 서다 상시 정체 구간이 돼 버렸다. 이것이 고속도로 진입 전에 거쳐야 하는 병목인 것인지, 잘못 들인 습관이 해독되는 과정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저 글 숙제를 내야 하는 날이 너무 자주 올 따름이다.


미루고 피하던 마흔이 이제 한 계절만을 앞두고 있으니 어쩔 수 없어 기꺼워야 할 판이기도 하고, 빼도 박도 못해 큰일 난 판이기도 하다. 남들 말하는 '아홉 수'가 어디서 터지려나 했더니 오만상 찌푸린 책상에서 만날 줄이야.


'중년의 글'이란 강산이 네 번 변하면서 아스라해 진 것을 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고향집 마당에 오손도손한 민들레나 청보리 밭의 서정을 추억하던 중년은 이제 거의 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공상과학영화에서나 짐작하던 2016년이 코밑까지 닥친 작금의 마흔은 아파트에서 태어나 엘리베이터로 정을 나누고 저마다 수업 시간표가 있으며 11자 복근 만드는 운동을 한다. 부뚜막이니 마중물이니 하는 게 없어졌다고 해서, 인덕션이니 탄산수니 하는 걸로 저녁을 차린다고 해서 폭 끓여낸 정서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떠한 시대건 반 평생 가까이를 살뜰히 살아낸 사람이라면 세상의 색과 결을 찬찬히 들여다 볼 여유가 아주 없진 않을 것이다. 나도 어려서는 아파트 공동현관에 나란한 유아용 자전거들의 싱그러움에 가슴 뭉클한 날이 올 줄 몰랐다. 어느 하나 같은 것 없이 제각각 알록진 안장마 한낮의 놀이와 피로와 설렘을 내려놓고 그릉그릉 꾸는 바퀴의 꿈이 어려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그 중 한 자리에 내 자전거 댈 곳이 있어야 했고, 아무렇게나 부리고 간 씽씽이가 걸리적거렸고, 얼른 올라가 다음 할 일을 해야 했으므로 바퀴가 내는 잠꼬대 같은 것엔 관심도 없었고 들리지도 않았다. 한 발 물러나, 또는 한 겹 가까이, 한 차원 깊숙이 만나게 되는 감흥을 어쩔 줄 몰라 지금은 이렇게 글이라도 쓴다.


이는 고진감래와 과유불급, 인과응보와 새옹지마의 중급 코스 정도는 수료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공부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살다 보니 절로 깨쳤고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흉도 많이 졌다. 사물에도 눈 코 입이 있으니 잘 보고 들어야 한다는 스승님의 도깨비 같은 말씀이 조막만한 햇사과를 닦다 불쑥 이해되기도 하는 나이다.


원망하여 분통 터지는 날보다 다행하여 감사하는 날이 많아졌고, 자식이 내는 겁은 다독이지만 내가 내는 겁은 조심스러워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나이. 그러면서도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뽈딱뽈딱 뛰어대는 통에 쓰지 않고는, 떠나지 않고는, 시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이. 그래도 되는 나이. 그 나이에 지면을 올라타 사그라져 보기도 하고 여물어져 보기도 하라고 수필이 우리를 부추기는 모양이다.


게다가 중년의 필자는 일단 신분확인이 되는 셈이다. 유아독존, 독야청청할 시기는 이미 한참 지났거나 까마득히 멀었으므로 우리는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내다보이는 너른 들판에서 책임지는 것, 기대는 것, 결정 난 것과 소망하는 것의 인연들과 엉켜 산다. 그 덩굴이 나를 부연하는 신용정보이고 담보이며 보증이다. 글이란 것이 일단은 누군가에게 읽히는 것이므로 비문이고 미문이고를 떠나서 진심이 담겨져 있느냐 아니냐는 특히 수필에 있어 중요한 요소일 것인 즉, 중년이 일군 덩굴 밭이 그것을 가려내는 시료가 될 것이다.


마흔이 넉 달 남았다. 알람 시계를 끄고도 밍그적대 듯 찌뿌드드하게 마흔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서둘러 마중 나가 오늘을 설칠 생각도 없다. 삼십 대엔 말간 무릎을 내놓고 못 가본 곳을 마저 뛰어다녀야겠다. 물론 나이를 더 먹고도 정강이 멍 자국 가실 날이 없겠지만, 아직은 아프기도 아물기도 잘 하는 삼십 대 아닌가. 글이 안 써져도, 커서 앞에서 벌을 받아도 지금은 그냥 재미있자. 태연자약 또 쓰고 또 무참하고 또 기고만장하자. 그러다 보면 세월이 쌓이고 담보가 두둑해지고 사위가 고요한 속에 쿵쾅대는 마음의 소리도 잘 들릴 테지.


지름길이니 노하우니 같은 것은 어차피 없고 누구나 새 종이에 새 글을 지어 탈없는 밥같이 되고자 하니 중년의 글쓰기라 하여 사정이 좋아질 리 없다. 생때같은 긴 글 한 편 탈고하기가 마흔 전엔 이미 글렀고, 두 장짜리 수필 쓰기 또한 매주 허덕이는데 햇볕 찬란하던 놀 궁리가 가을 바람에 꺾여 핑계 둘 곳이 없다. 부지런히 쓸 궁리를 해보자. 마흔도 다 돼 가는데.(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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