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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Dec 22. 2021

글을 걷다


언어학자씩이나 되지도 않았을 거예요. 어느 호사가가 해본 소리인즉슨, '바다'라는 의미의 영어 sea와 '보다'라는 의미의 영어 see는 스펠링도 한글 철자도 비슷하니 언어가 지닌 범세계적 공감대가 이와 같다, 하는 것이었어요. 열네 살 문학소녀에게는 글 쓸 패기를 더 북돋아준 얘기였겠으나 사실 족보 있는 이론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알고 말고요.


글 공부에는 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 한 가닥이라도 아쉽습니다. 은유 없는 창의성 없고, 비약 없는 새로움 없지요. 일단은 이리 뒤섞고 저리 꿰맞추어봐야 실재의 암막에서 자그마한 틈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찬란한 크리에이티브의 빛 줄기가 뚫고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그런 차원에서 나는 '창의력 운동'이란 것을 하는데, 전혀 엉뚱한 단어 두 개를 놓고 유사성과 차이점, 개연성이나 인과관계 따위를 추리해보는 일이에요. 또 아이와 함께 하는 '상대말 찾기'는 흑백 같이 단호한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석탄의 상대말은 뭘까?" 하면 지우개도 답이 되고 솜사탕도 답이 되는 놀이랍니다. 글쓰기라는 작업에 필요한 뇌 근육은 통화 중에 메모를 받아적는 근육과는 분명 다를 겁니다. 평소에는 자주 쓰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의도적으로 단련해두지 않으면, 넓디 너른 원고지 이랑을 맞닥뜨렸을 때 제대로 된 글 파종을 해낼 수 없어서입니다.


오늘 운동시간에는 글자가 비슷하면서 뜻까지 통하는 단어들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살이 있다 - 살아 있다

     부르다 - 부리다

     삶 - 숨

     밀다 - 멀다

     사람 - 사랑


그리고 '길-글'이 그러합니다.


길처럼 융통성 없는 것이 있을까요. 인간이 중력에 매여 있는 한, 길은 질러가든 둘러가든 내 발로 일일이 짚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내 걸음, 내 호흡에 맞춰 저마다의 길이 다르고, 많은 이가 오간다 해서 닳아 무색해지지 않습니다. 앞서 걷는 누구라도 먼저 지나간 이의 발자국을 목도해야 하고, 내 뒷모습 역시 뒤따를 이에게 고스란히 노출될 수 밖에 없지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으니 모든 길을 다 걸어 볼 수 없거니와 그 와중에 없던 길이 새로 나기도 합니다. 시간처럼, 역사처럼 길은 어느 한 곳 비거나 끊어지지 않은 채 무한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디딘 채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이며 한 자 한 자 새겨가야 하는 글도 길과 닮았습니다. 모든 글을 다 써 버릴 수 없고, 모든 글을 다 읽어 없앨 수 없습니다. 신기술 신제품이 온 세상을 바꿔놓을 동안에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방식만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이유겠지요. 최첨단의 다양한 교통수단이 등장한들 거기에 타러 가거나 내려서 다다르기 위해서는 두 다리로 걸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나는 한 자 한 자 글을 걷습니다. 선배들이 걷던 글을 내 두 다리로, 내 방식으로 차근차근 걷습니다. 생경한 볼거리에 가볍게 몸을 풀어봅니다. 처음 보는 것이나 아름다운 풍경이라면 흥미롭고 남다른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요. 두리번두리번 글감 타령을 하는 단계입니다.


걸음에 리듬감이 생기고 탄력이 붙을 쯤이면 내면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됩니다. 나를 걷고 숨쉬게 만드는 크고 작은 힘들, 변화들이 느껴집니다. 내 안의 가느다란 흔들림, 벅참, 탄성, 숨가쁨, 희열, 통증, 뉘우침 등과 고요히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가치관을 공고히 하고, 간절한 것을 깨닫거나 더 나아갈 의지가 샘솟는 때이기도 하고요.


너무 힘들 때는 시원한 영감을 벌컥벌컥 들이켜야지요.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나고, 뭔가 배우거나 여행을 떠나기도 해요. 추상에서 구체를 붙잡을 때, 또는 익숙함이 낯설게 여겨질 때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길 힘을 얻습니다.


도착을 앞두고는 조바심과 싸워야 합니다. 오늘의 글은 내일의 글에 발자취가 되므로 함부로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되돌아 나오더라도, 샛길로 빠지더라도 오르막길 내리막길 자갈길 흙 길을 스스로 걷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 소소한 여정이 나 자신에게 그러했듯,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면 좋겠네요. 그런 열망과 약간의 만족과 더 큰 아쉬움이 나로 하여금 다시 글에 나서게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글을 향한 더 단단한 각오가 생깁니다. 호흡을 고르고 다시 나아가려 합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글이 너무나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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