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걷다

by 이런아란


언어학자씩이나 되지도 않았을 거예요. 어느 호사가가 해본 소리인즉슨, '바다'라는 의미의 영어 sea와 '보다'라는 의미의 영어 see는 스펠링도 한글 철자도 비슷하니 언어가 지닌 범세계적 공감대가 이와 같다, 하는 것이었어요. 열네 살 문학소녀에게는 글 쓸 패기를 더 북돋아준 얘기였겠으나 사실 족보 있는 이론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알고 말고요.


글 공부에는 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 한 가닥이라도 아쉽습니다. 은유 없는 창의성 없고, 비약 없는 새로움 없지요. 일단은 이리 뒤섞고 저리 꿰맞추어봐야 실재의 암막에서 자그마한 틈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찬란한 크리에이티브의 빛 줄기가 뚫고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그런 차원에서 나는 '창의력 운동'이란 것을 하는데, 전혀 엉뚱한 단어 두 개를 놓고 유사성과 차이점, 개연성이나 인과관계 따위를 추리해보는 일이에요. 또 아이와 함께 하는 '상대말 찾기'는 흑백 같이 단호한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석탄의 상대말은 뭘까?" 하면 지우개도 답이 되고 솜사탕도 답이 되는 놀이랍니다. 글쓰기라는 작업에 필요한 뇌 근육은 통화 중에 메모를 받아적는 근육과는 분명 다를 겁니다. 평소에는 자주 쓰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의도적으로 단련해두지 않으면, 넓디 너른 원고지 이랑을 맞닥뜨렸을 때 제대로 된 글 파종을 해낼 수 없어서입니다.


오늘 운동시간에는 글자가 비슷하면서 뜻까지 통하는 단어들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살이 있다 - 살아 있다

부르다 - 부리다

삶 - 숨

밀다 - 멀다

사람 - 사랑


그리고 '길-글'이 그러합니다.


길처럼 융통성 없는 것이 있을까요. 인간이 중력에 매여 있는 한, 길은 질러가든 둘러가든 내 발로 일일이 짚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내 걸음, 내 호흡에 맞춰 저마다의 길이 다르고, 많은 이가 오간다 해서 닳아 무색해지지 않습니다. 앞서 걷는 누구라도 먼저 지나간 이의 발자국을 목도해야 하고, 내 뒷모습 역시 뒤따를 이에게 고스란히 노출될 수 밖에 없지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으니 모든 길을 다 걸어 볼 수 없거니와 그 와중에 없던 길이 새로 나기도 합니다. 시간처럼, 역사처럼 길은 어느 한 곳 비거나 끊어지지 않은 채 무한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디딘 채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이며 한 자 한 자 새겨가야 하는 글도 길과 닮았습니다. 모든 글을 다 써 버릴 수 없고, 모든 글을 다 읽어 없앨 수 없습니다. 신기술 신제품이 온 세상을 바꿔놓을 동안에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방식만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이유겠지요. 최첨단의 다양한 교통수단이 등장한들 거기에 타러 가거나 내려서 다다르기 위해서는 두 다리로 걸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나는 한 자 한 자 글을 걷습니다. 선배들이 걷던 글을 내 두 다리로, 내 방식으로 차근차근 걷습니다. 생경한 볼거리에 가볍게 몸을 풀어봅니다. 처음 보는 것이나 아름다운 풍경이라면 흥미롭고 남다른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요. 두리번두리번 글감 타령을 하는 단계입니다.


걸음에 리듬감이 생기고 탄력이 붙을 쯤이면 내면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됩니다. 나를 걷고 숨쉬게 만드는 크고 작은 힘들, 변화들이 느껴집니다. 내 안의 가느다란 흔들림, 벅참, 탄성, 숨가쁨, 희열, 통증, 뉘우침 등과 고요히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가치관을 공고히 하고, 간절한 것을 깨닫거나 더 나아갈 의지가 샘솟는 때이기도 하고요.


너무 힘들 때는 시원한 영감을 벌컥벌컥 들이켜야지요.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나고, 뭔가 배우거나 여행을 떠나기도 해요. 추상에서 구체를 붙잡을 때, 또는 익숙함이 낯설게 여겨질 때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길 힘을 얻습니다.


도착을 앞두고는 조바심과 싸워야 합니다. 오늘의 글은 내일의 글에 발자취가 되므로 함부로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되돌아 나오더라도, 샛길로 빠지더라도 오르막길 내리막길 자갈길 흙 길을 스스로 걷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 소소한 여정이 나 자신에게 그러했듯,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면 좋겠네요. 그런 열망과 약간의 만족과 더 큰 아쉬움이 나로 하여금 다시 글에 나서게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글을 향한 더 단단한 각오가 생깁니다. 호흡을 고르고 다시 나아가려 합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글이 너무나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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