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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Dec 08. 2020

아기들의 밤그림자

하늘로 반사된 세상 아기들의 좌표

유도분만 중 태아는 사망하고 산모는 중태에 빠졌다고 했다. 눈도 한 번 못 맞춰본 자식. 이름 한 번 못 불러본 내 새끼. 그래서 그 슬픔이 덜할 것인가 더할 것인가. 거기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지. 단장의 고통으로 까무라치긴 마찬가지일 텐데.

이런 악랄한 셈을 해보는 자는 뉴스를 뉴스로만 보는 나뿐, 산모는 품은 자식을 놓지 못해 기를 쓸 따름이리라. 그런 그녀를 자식으로 둔 늙은 어미가 또 그것을 기 쓰고 말릴 것이고. 꽃밭에서든 똥밭에서든 자식을 품 밖에 내려놓기 조심스러운 어미나 하늘 아래서건 위에서건 엄마 없으면 고아가 되고 마는 자식들 처지가 이렇듯 서럽다.


우리 둘째 두 돌 즈음이었다. 머리가 깨는 만큼 장난이 늘어 볼이며 무릎이며 멍 가실 날 없던 녀석이 혼자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내려간 일이 있었다. 양손에 짐이 가득이었던 나는 우리집 층수에 도착하자 앞서 내렸고, 큰딸이 까불어대는 동생을 데려나올 참인데 순식간에 승강기 문이 닫혀버린 것이다.

계단으로 뛰어가려는 큰애를 진정시키고, 경비실로 전화를 걸어 승강기 내부 CCTV 확인을 요청할 동안 엘리베이터가 잠시 6층에서 멈췄다. 저녁 일곱 시. 누구든 어른이 탈 듯싶었고, 인사 잘 하는 우리 라인 막둥이를 알아볼 듯싶었다. 그랬으면 했다. 1층에 서는 것을 확인하고 나도 내려갔다. 평소 인정 많은 6층 아줌마가 녀석을 안고 있고 낯익은 어린 여학생도 꼬맹이를 어른답시고 제 갈 길 가지 않고 같이 서 있었다. 누런 콧물이 입에 들어가기 일보직전인 걸 빼면 녀석은 말짱하게 엄마 품으로 돌아왔다. 10분이나 될까 한, 나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던, 불안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 애쓰던 그 시간.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그렇다면 그 아이는 이미 내 자식만은 아니라는 건데. 나는 그 아이를 국보 다루듯 잘 돌봐야 하는데. 그 선물 주신 삼신할매, 조상님, 하느님께 야단 맞을 게 겁나서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데. 그래서 그날 기도는 ‘죄송합니다’ 뿐이었다. 함께 마음 졸인 큰아이에게, 속은 어떨지 모를 둘째한테, 우리 가족 우리 이웃에게까지 용서를 빌어야 했다.


아이 하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마을의 미래를 불행하게 하는 것과 같으니까. 한 아이의 고통은 십 수년 뒤 공동체의 고통이자 결핍, 위기, 취약점으로 이어질 것이다. 더 나쁜 것은 그 아이의 아이에게까지 대물림 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다. 그 약한 고리를 지금 돌보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많은 재원과 정성이 필요해지고, 때론 개선 자체가 불가할 수도 있다. 끼고 키운 내 자녀에게 짐이 될 수도,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 자식 하나만 살뜰히 키워서 쾌적한 미래를 선사하겠다는 계산에는 이런 변수가 빠져 있다. 우리 마을에 혹시 굶는 아이가 없는지, 춥고 외롭고, 절망이나 분노를 키워가는 아이가 없는지 살피는 마음에는 사실 이런 식의 셈이 들어있는 것이다.


종일 한시도 가만 있지 않던 아이가 두 팔 두 다리를 옆으로 모으고 잠들었다. 너무 가지런해서, 너무 앙증맞고 포근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평화로운 그림 같다. 땀도 눈물도 냄새도 없는, 아득하고 경이로운, 평생 고개를 치켜 올리고 봐오던 별 같은 것이 우리집 안방에 이렇게 작고 낮게 놓여있다. 집집마다 이 아이들 그림자가 하늘에 별로 드리운 것은 아닐까. 누구든 찾기 쉽고, 확인하기 쉽도록 하늘로 반사된 세상 아기들의 좌표. 어지러운 낮 동안에는 각자의 밥 버는 삶이 눈 부시어 보이지 않다가 사위가 어둑해져서야, 아이들이 이부자리 위에 그림으로 새겨져서야 저렇게 또렷이 보인다. 아기가 한 번 뒤척, 할 때 별도 따라 반짝. 옹알, 잠꼬대 할 때 별도 같이 옴찔.

때로 별들이 와글와글해 보이는 까닭도 종일 녀석들이 꼼지락거린 여운 때문이리라. 뜻도 없이 흥얼거린 노래와 못 견디겠다는 듯 터져 나오던 웃음 때문에, 그리고 내일 또 북을 두드리고 소꿉을 지을 그 부산하고 설레는 꿈 때문에 어떤 밤은 별들이 극성을 부린다.


갈수록 별 보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알다시피 사람과 별 사이 공간이 너무 밝아져서다. 혹시 나만 손해 보는 게 없는지 눈을 밝히고, 이문을 밝히고, 셈을 밝힌 세상은 밤도 낮만큼 훤하다. 어두워야 잘 보이는 그 밤그림자 헤아리기가 자꾸만 힘들어진다. 과거로부터 받은 선물, 미래로부터 받은 희망. 우리 아기들이 어제만큼 많이, 처음처럼 편안히, 원래대로 행복하게 반짝이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코로나로 학교에 못 간 형제가 빈집에서 라면을 끓이다 불이 났다. 중태에 빠져 한달 간 중환자실에 있던 아이들이 일반병실로 옮겼다는 소식이다. 지역구에서 모금활동을 통해 아이들 병원비와 재활비를 돕는다는 뉴스가 함께 들린다. 의식은 돌아왔으나 아직 말할 수 없다는 여덟 살 동생이 소리 내 웃는 날, 이 나라와 우리 마을과 내 가정의 근심이 조금 덜어질 수 있을까.(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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