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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Dec 15. 2020

흔한 죽음

잘 지내고 있어 영주야

죽음은 이제 너무 흔한 것이 돼 버렸을까. 문상 다닐 일이 늘면서, 매일 아침 코로나 사망자 수를 확인하면서, 타 죽고 빠져 죽는 사고들을 반복해 지켜보고, 영화나 드라마 속 죽음이란 소재를 소비하면서, 나는 이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식음을 전폐하지도 일손을 내려놓지도 않는다. 굉음을 내며 곁을 지나가는 스포츠 카만큼도 우리 발길을 멈춰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풍경처럼 고요하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간단한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한 사촌동생의 죽음 뒤에도 세상은 조금도 타격입지 않고 변모하지 않았으며 잠깐 멈춰서지도 않는 것이 나는 화가 난다. 이 마음이 슬픔인지 연민인지 철없는 짓거리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작은 6년 전이었다. 그 싱그럽던 생들을 차가운 바다 속에 내버려 두고도 정쟁은 정쟁대로 벌어지고 잔치는 잔치대로 벌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널브러져 수습되지 못한 죽음을 비아냥대거나 못 본 척하거나 서둘러 치우라 했고, 어서 잊고 아무렇지 않아하고 극복하라고 했다. 나는 온전히 모조리 슬프지도 못했는데. 내가 어른스럽지 못한 건가, 효율적이지 못한 것인가. 혼란스럽고 화가 났다. 그 마음을 풀지 못한 채 삐딱한 생채기가 난 모양이다.


누구에게나 생일이 있듯 자신만의 기일을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돌아가며 곗돈을 타듯, 한 표씩 선거권을 갖듯 공평한 일이다. 그래 보인다. 순서나 때를 몰라 그렇지 모두가 죽고 모두가 견딘다. 어른스럽게, 효율적으로, 또는 인류사회학적으로 아무렇지 않아하고 멈춰서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 두 번 반 절을 올리는 사이. 상주에게 위로를 건네고 돼지수육을 집어 드는 그 잠깐 사이 일상을 정지시킬 뿐이다. 나는 그 세련된 극복이 왠지 원통하여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고 울었다.


나 역시 곡기를 끊지도, 삼년상을 치르지도 않을 거면서 그저 심통만 부린다. 죽음이 이토록 흔해 빠져버린 것이 억울하여, 내 죽음 역시 이토록 세련되게 가벼울 것이 허무하여 나는 어린 동생의 죽음 뒤에서, 삼우제 중간에 몇 술 뜬 잡채밥이 목에 걸려 울컥울컥 화가 난다. 뭘 어쩌자는 것도 아니면서 아들을 잃고 오빠를 잃은 이들 앞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주제에 괜히 속으로만 성질을 부리고 있다.


영정사진 속 동생은 평생 입어보지 못한 양복차림이었다. 셀카 사진에 포토샵으로 합성을 했다 한다. 그는 선천성 근육병 환자였다. 처음에는 잘 때만, 나중에는 종일 산소호흡기를 썼다. 엄마 등에 업혀 학교를 다녔고, 사이버강의로 학위를 땄다. 장애인 협회 일도 부지런이었다. 회의에 참석하려고 휠체어가 실리는 장애인 택시를 호출하면 길게는 몇 시간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왕복, 그렇게 여러 명. 그렇게들 모여 하는 회의였다.


터울 많은 동생의 든든한 오빠였고, 미안한 게 많은 부부의 장남, 가족 온라인 모임방에서 빠짐없이 댓글을 달던 순한 조카, 손 빠른 전직 협회장, 인터넷 게임 안에서 축구를 하고, 헝겊 인형을 안고 자던, 양복 한 벌 없는 서른 여섯 살.


제상에는 프리첼이 올라갔다. 단단하고 텁텁한 그걸 너는 좋아했구나. 가는 길에 필요할 거라고 동생은 오빠 안경과 이어폰을 꺼내놓았다. 그리곤 절을 했다. 두 팔을 폈다 모으며 무릎 굽혀 앉았다 엎드리고 다시 일어났다. 한없이 반복되었다.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녀석은 녀석대로 그래야 할 것이었다. 세련된 이별 같은 게 더 힘들 때도 있다. 화낼 처지조차 못 되는 나는 아이 하원시간이 다가와 먼저 자리를 떴다.


집에 와서 아이들을 실컷 안는다. 살아있는 애들을 먹이고 야단치고 또 어울리고 쓰다듬어 재운다. 죽음이 흔한 속에서 이토록 삶이 귀하다. 무릎 힘이 빠질 만큼 다행이어서 화내던 기세 간 곳 없이 안도한다. 살아서 너를 추모할 수 있어서, 조카들이 너를 그리워할 수 있어서, 네 전동 휠체어에 매달려 놀던 일을 기억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흔해 빠진 들꽃이지만 그 중 한 송이가 쓰러져 낙담하는 벌레도 있을 것이다. 지천으로 널린 중 하필 그 하나가 자신의 하늘이요 땅이요, 터전이요 일상이어서 그 부재 이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넋을 잃는 누군가, 무언가가 있을 지 모른다. 제아무리 죽음이 지천이고 우리의 운명이라 해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숨막히는 죽음이 있다.


동생은 친하게 지내던 환우의 죽음 후 극도로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 고통이 요로결석으로 응어리져 밤낮없이 아팠다. 다들 간단하다고 하는 시술 전, 사는 동안 여한 없었노라 문자를 써놓고 전송하지 않은 것을 사후에 발견했다.


안경과 이어폰이면 되려나 모르겠다. 구두가, 구두가 있어야 할 텐데. 여기서는 한 번도 신어보지 못한 그것이 거기서는 필요할는지. 아니면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는지. 훨훨 날고 뛰고 자유로운 그곳에서는 그 무엇 없이도 평화롭지 않을는지.


갓 구운 프리첼을 사 들고 갈게. 잘 지내고 있어 영주야. 나중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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