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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Dec 16. 2020

그의 사명


조물주가 나를 만들어 세상에 내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누구라도 해봄직한 자문이지만, 장애인이라면, 선천적으로 신체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면 더욱 절실히 답을 구하고자 했을 것 같다. 신은 유머감각이 뛰어난 듯은 하여도 실수 같은 건 할 리가 만무한 즉, 어떻게 이 질문에 접근해야 할지 긴 시간 답답했을 거라 짐작해본다.


신은 전지전능하여 객관식으로 문제를 풀지 않는다. 상대성으로 존재를 입증하지 않는다. 신은 인류 전체를 아끼면서도 개인 하나 하나에 우주적 가치와 애정을 쏟는, 매우 복잡하고 필연적인 단 하나의 정답을 도출한다. 어쩔 수 없이 차선을 택하는 법도, 부작용을 감내하는 법도 없다. 분명 헤아리기 불가한 존재의 이유가 있을 거라 믿는다. ‘신’이라 쓰여진 부분을 ‘자연’이라 읽어도 무방할 것이며, 신앙이 있건 없건 그 답을 탐구하는 과정에 문학과 예술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문학과 예술이.


정의에 대해 생각해볼 때도, 법의학을 정립하고 사회학을 이해할 때도, 역사를 해석하고 과학을 발전시킬 때에도 인간이 개별 또는 집합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가늠해야만 그 원칙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생물학적 번성체로만 본다면 오로지 생명의 효율성만 원칙으로 삼겠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활력 징후가 높고 낮은 것으로 사람의 가치를 헤아리지 않는다.


나 역시 종종 자문한다. 나의 사명은 무엇일까 같은 거창한 질문이 아니라 내 안에는 왜 없어도 좋을, 아니 있어서 괴롭고 일을 망치는 성격 또는 생각, 습성 같은 것이 있는가 하는 수준이다. 그런 저열하고 나약한 면만 없다면 나는 나를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 훨씬 더 가치 있게 쓰일 수 있을 텐데. 질문이 원망으로 옮아가기 전 서둘러 사색을 마치곤 한다.


 이런 나를 가엽게 여기듯 십오 분짜리 동영상 하나가 내 앞에 나타났다. 최재천. 대학교수보다 통섭학자로 불리는 사람. 생명다양성재단 전 대표이자 UN 생명다양성협의 전 의장.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는 제목의 강연이었다.


말레이시아 드넓은 농장에 바나나를 심는다고 치자. 다양했던 자연생태계를 모두 갈아엎고 상품성 높은 단일종 하나만 심고 가꾼다. 원래 거기서 살아오던 벌레가 해충으로 둔갑한다. 수확을 늘이기 위해 해충 퇴치에 온갖 방법이 동원된다. 가장 손쉬운 것은 역시 살충제. 박멸이란 개념적 상태에 불과할 뿐, 내성이 생긴 종자는 살아남는다. 강한 살충제를 이겨낸 강한 우성인자가 변이 진화하므로 계속해서 더 독한 살충제가 필요하게 된다.


이번에는 양계장. 생장, 육질, 산란, 관리 등이 좋은 품종 하나만을 집약적으로 키운다. 최소한의 면적에서 최대한의 속도로 사육하던 중 철새 등 어떤 자연적 상태의 바이러스를 만난다. 해당 단일 품종은 항체도 모두 동일하므로 한 마리가 쓰러지면 전체가 쓰러질 수밖에 없다. 예견된 몰살. 그렇게 조류독감이 돌고 수천 마리가 생매장 당하고 축산업가가 쓰러지고 해마다 반복이다.


사람으로 바꿔 생각해보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알을 많이 낳기 위해 다닥다닥 모여 사는 게 아니므로.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서라기보다 존재의 이유로 유한의 생을 가치 있게 살고자 한다. 그런 내 안의 다양한 면이 존엄성이나 생존력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때로는 뜻밖의 면 덕분에도 말이다. 가령 어떤 일을 게으르게 미뤄둔 덕에 불필요한 번복을 막을 때도 있다. 이럴 때는 신중했노라 자평한다. 유난히 딸꾹질이 잦다면 그만큼 기도로의 이물질 유입이 최대한 방어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닭 울음소리를 잘 내서 황제에게 천거됐다는 이야기며, 평소 혐오하던 거미줄 덕에 알렉산더 대왕이 적에게 발각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문득 떠오른다.


다양한 종, 면모, 성향, 상태는 그럴 만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해야 하기에 그런 것이다. 다양성의 자연에서, 사회에서, 역사에서 어떤 면이 우성 생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연은 순수함, 그러니까 획일화된 상태를 혐오한다. 자연은 끝없이 다양하게 풍요로워지고 서로 뒤섞이고 충돌하며 융합한다. 자연계의 일부인 인간도 그 다양성에 발맞춰야 할 수밖에 없다.


자연의 어머니건 십자가 못 박힌 아버지건 내 사촌동생을 근육병 환자로 태어나게 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질환 자체가 소멸하지도 않았고, 마침 어질고 영리한 내 동생이 그 병을 타고나 휠체어와 한 몸으로 지내며 묵묵히 장애인 권익 개선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두 딸을 키우면서 유아차를 밀고 다녔던 그 경사로와 턱 없는 진입로가 동생의 업적이기도 했을 거라고 말이다.


경기도 수원에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애 통합놀이터가 개장한다. 장애인 비장애인 관계없이 모든 어린이가 즐길 수 있는 놀이터다. 휠체어를 탄 채 트램펄린에서 뛰어 놀 수 있고, 안전벨트로 고정한 그네를 탈 수 있는 곳. 현재는 전국 십여 곳뿐이지만 앞으로 광주시에만 여섯 개가 더 생길 예정이란다.


작년 한해 새로 등록한 장애인은 9만7천명이었다. 지체 장애의 95%는 후천적 원인에 의해서다. 더 빨라지고 더 무거워진 차량간 사고가 대형화한 것도 이유일 것이다. 질환으로 인한 장애 발생률은 이보다 훨씬 높다. 고령화로 휠체어 인구가 급증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인류 생태계가 진행되는 방향이라면 그것을 준비하는 동력이 필요하다. 그 역사의 바퀴를 누군가 밀고 있다. 가장 절실한 동기로, 가장 치열하게, 가장 불편한 몸으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동생이 왔다 간 거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녀석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된 식당 지도를 만들었고, 초등학교에서 장애인 인식 개선 강사로 일했다. 더 깊은 공부를 위해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학 학위를 땄으며, 부산 근육장애인 협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청년 장애인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후원금 지원활동에도 애썼다. 그리고 하모니카를 불었다. 산소호흡기를 차고도 그 많은 무대에 올라 핸디캡 없는 온전한 울림을 주었다.


물론 이 안에만 동생의 삶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손녀딸만 줄줄이던 집안에 태어나 우리 할머니의 똥강아지로도 아름다운 삶이었다. 나 같은 범인이 장애인의 박탈감과 유린된 인권, 그 가족의 노고를 생각하게 된 계기 역시 그 덕분이다.


그리움은 재와 함께 타버리지 않는다. 고운 가루가 곱지 않은 서걱댐으로 가슴 켠에 쌓인다. 동생의 유산은 산 사람과 앞으로의 사람이 이어가야 하리라. 조금은 철없이 살아도 좋았을 그에게 빚진 마음으로. 사명감에 어깨 무거워 한 번도 무릎 펴고 일어서지 못했던 영주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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