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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Dec 07. 2021

찬희와 찬우


이제야 도착했어. 멀더라. 어째 갈 때보다 올 때가 더 먼 것 같더라. 너를 거기에 두고 와서 그런가. 그래도 우리는 달리고 달리면 그 끝에서 만날 수 있으니까. 길이 제 아무리 멀어봤자 너와 나 손 닿는 이만큼에서 더 연장되고 연장된 것에 지나지 않지. 그래. 우리는 철석같이 만나고야 만다, 그러려고만 하면.


너는 이 길을 얼마나 오갔으려나. 그 많고 많은 터널들과 한가하게 구불텅거리는 국도와 네 귀퉁이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논밭들을 지나 나즈막한 병원 입구가 나타나기까지. 마치 귀한 애기씨 별채처럼 소담하게 들어선, 이 속살거리는 듯한 입구를 너는 얼마나 자주 드나들었겠니. 어떤 날은 거칠게 차를 대고, 어떤 날은 밖에서 조금 서성이다가, 어떤 날은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너는 아버지를 보러 갔겠구나. 톨게이트 무수히 스쳐갔을 이마가 어째 전보다 더 훤해진 느낌이 든다. 오늘 따라 네 양복 저고리까지 커 보이는 구나. 갑자기 어른이 된 아이가 아버지의 옷을 입고 어쩔 줄 몰라 하는구나.


어머니를 만나러 앞으로도 이 길을 달려오게 되겠지. 막막함 때문에 이제는 이 길이 더 멀게 느껴지려나. 건너가지 못할 곳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겠니. 지금 네 텅 빈 눈에는 어떤 질문도 담기지 못하겠지. 너는 어머니와 누나들에게 방금 전 너와 맞절을 나눈 문상객을 소개하는 일만도 버거워 보였다. 네가 단어를 찾아낼 동안 나는 덥석 어머님의 팔꿈치부터 붙들었다마는.


오는 길에 찬희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땐가 같은 반인 남자아이였는데 얼마나 개구졌는지 몰라. 너도 알 거야. 학교에서 소문난 말썽쟁이였으니까. 지금 내가 애 엄마씩이나 되었으니 개구지다고 말하는 거지, 또래 때는 고 녀석 못된 짓이 싫어서 눈을 흘기거나 아예 피해 다니기 바빴다. 녀석은 공부도 잘했고, 바이올린도 입이 떡 벌어지게 연주했으며, 인근에서 꽤나 고급 진 아파트에 살았지. 게다가 누나가 둘이나 있어서 한 대 쥐어 박아볼 수도 없는 강적이었다. 나는 부반장으로, 그애는 반장으로 티격태격 일 년을 지낸 뒤 곧 새 학년으로 갈라설 어느 봄. 사색이 된 선생님이 녀석을 교실 밖으로 불러냈다. 그 길로 찬희는 학교를 나섰고, 그를 다시 본 건 어느 장례식장에서였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작고 깡마른 체구, 언제나 생글거리는 표정이 더 얄미운 녀석이었는데, 그날은 다른 사람만 같았다. 아이는 헐거운 검정 양복을 입고, 팔뚝에 허연 완장까지 차고 있었다. 그 저고리가 얼마나 커 보이던지 녀석의 어깨를 바닥으로 주저 앉힐 듯 보였다. 게다가 축 쳐진 삼베 완장이,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지만, 마치 술래의 표식이나 벌 받는 징표처럼 보여서 그래서 녀석이 더 울상인 것만 같았다. 저러다 진짜로 울면 어떡하지, 나는 겁이 나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순한 여자애들을 마구 울리고 다니던 녀석이었는데, 여기서 녀석이 우는 걸 봐버리면 뭔가 세상이 엉키고 말 것 같은 심정이었다. 작은 악당은 끝내 누나들과 엄마의 치마 폭에서 엉엉 소리내 울고 말더라. 이런 벌을 받는 것도, 그 앞에 내가 선 것도 녀석은 불감당해했고, 분통해했다. 선생님은 그런 찬희를 안쓰러워하느라 엉킨 세상 앞에 내던져진 작은 조문객의 혼란까지는 신경 써주질 못했다.


누구보다도 억세고 뜨거운 악수를 건네는 너잖니. 불거진 네 손마디가 나를 놔줄 때까지 나는 잘 지내고 있다는 눈빛을 만들어 보내야 했다. 거짓이기라도 하면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나는 마치 진짜야! 하듯 미간을 찡그리거나 입을 앙다물어 확답을 전한다. 그런 보고를, 너는 오늘 청하지도 받지도 않는구나. 청할 수도 받을 수도 없어서 나는 너를 오늘 만나고도 만나지 않은 듯 하고, 그래서 더더욱 돌아오는 길이 아득했는지 모른다.


젊고 강철같던 세상을 잃은 어린 악당은, 그후 어떻게 살았을까. 세상은 그쪽에도, 우리 쪽에도 무너지고 말아서 더 이상 전과 같은 분란들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제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든 그가, 그때의 자기 또래쯤의 아이를 키우며 뜨겁고 억세게 살아가길 빌 뿐이다. 칭찬 받을 곳도, 야단 맞을 곳도 사라진, 아버지 잃은 사내의 눈 둘 곳 없는 방황이 끝났기를.


잘 다녀올게, 했던 인사를 지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약속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가족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너도 약속해주렴. 다음에는 힘차게 내 안부를 묻겠다고. 내 약속도 전한다. 네가 엉터리로 지내는지 어쩌는지 내가 단단히 지켜보겠다고. 먼저 어른이 된 네가 의젓하게 살아내는 모습을 나는 두고두고 살피겠다고.


아버님 모신 후에야 비가 내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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