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일궈 먹고 산다는 일

농가에겐 무엇이 필요한가?

by RanA

학창시절, 친구 중 한 명의 부모님께서 토마토 농사를 지으셨다. 친구의 어머니와 친하신 내 어머니께서는 매년 토마토 철이면 친구네 농장에 가 상품성 없는 못난이 토마토를 헐값에 사오셨다. 친구의 어머니께선 토마토를 매번 값어치보다 훨씬 많이 담아주셔서 토마토를 박스에 담아왔다기 보단 쌓아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덕분에 1년에 3-4개월정도는 입에서 토마토 냄새가 날 정도로 토마토를 달고 살았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6월 모의고사를 볼 무렵,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그날 아침에 학교 기숙사 방에서 일어나 식사를 하러 가다가 목격한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기숙사 앞에 우뚝 서 있던 키 큰 소나무 세 그루가 힘없이 쓰러져 있었고, 그 옆으론 학교 본관 건물 외벽에 붙어있던 철제 마감재가 널브러져 있었다. 친구네 토마토 농장도 곤파스의 영향을 피해 가지 못했다. 토마토가 자라던 하우스가 크게 파손돼 그 해엔 열매를 맺은 토마토 그루가 반토막 났고, 그나마 열린 토마토 중에도 상품성 없는 열매가 반 이상이 되었다고 했다. 그 친구네 집이 어떻게 재해 뒷수습을 했는지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지만, 태풍이 지나간 이후 내 친구는 고3 중요한 시기인데도 며칠 기숙사에 외박계를 쓰고 방과후 부모님의 밭 복구작업을 도우러 갔다.


농업은 자연이 알맞은 환경을 허락해야 하는 산업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 생산량이 증대돼도, 기본적으로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친구네 토마토 농장 이야기처럼 자연재해로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건 비극이다. 반대로 작물 생산량이 너무 많은 것 역시 농업 종사자들에겐 기쁜 소식이 아니다. 올해 많은 대파 농가들이 대파를 모두 수확하는 대신 파가 그대로 뿌리내리고 있는 밭을 트랙터로 뒤집어 엎었다. 수요보다 생산량이 과도하게 많아 파의 시장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재배/유통할수록 손해 보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재화를 찍어내는 산업처럼 수요에 맞게 공급자가 공급량을 조절할 수 없다는 농업의 취약점은 매년 농업 종사자들을 노심초사하게 한다.


환경적 영향 때문에 매해 결과물이 안정적이지 못한 농업이지만, 국민의 식재료를 공급하는 농업을 결코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농가 소득의 안정성을 꾀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농업 직불제 등 농가 지원책을 마련하는 이유다. 특히 그간 대농 위주로 혜택이 돌아간다는 문제제기를 받았던 기존 직불제가 올해부턴 공익형 직불제로 개편됐다. 또한 매년 수확량이 수요보다 많은 쌀의 경우 일부는 국가가 수매하고, 쌀 농가가 다른 작물 재배로 전환할 경우 국가적 지원을 하는 정책도 시행되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이 농가를 위한다는 정책들이 장기적인 시각으로 디자인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몇 해 전 국내에 아로니아 열풍이 분 적이 있다. 당시 정부에선 쌀 농가에 아로니아 재배 전환을 독려하며 아로니아를 재배하면 쌀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익을 볼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문제는 정부가 이와 같은 정책을 폈을 당시에 한국에는 아로니아 농가가 거의 없었고, 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수요가 급격히 늘어 일시적으로 아로니아의 시장가격은 폭등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정부의 말만 믿고 아로니아 재배로 전향한 농가는 한두 해 후, 땅을 치고 후회했다. 아로니아 유행이 끝나면서 수요가 줄어들었고, 이미 전국 곳곳에 아로니아 재배 농가가 많아져 공급과잉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정부의 근시안적인 농촌 지원 정책이 실패한 전형적인 사례다.


농가 지원책이 농업이라는 산업 자체에만 집중되고 있다는 점 역시 문제다. 특정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해당 산업을 통한 소득 보전과 함께 산업 종사자의 생활수준을 일정 정도 이상으로 확보해주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지역 간 생활인프라 차이 문제가 계속해서 지적돼왔는데 해결의 기미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농가가 많은 지역 소도시의 경우 인구가 줄어듦에 따라 지방세 세수가 부족해져 지자체 차원에서의 인프라 구축도 힘든 상황이다. 가장 기초적인 교통, 의료 인프라 구축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 농촌 인구 부족 문제를 논하고, 농가 지원책을 논하는 건 아니 뗀 굴뚝에서 연기가 나길 바라는 것과 같은 태도로 보인다.


가뜩이나 올해엔 코로나19의 여파로 소비 심리가 얼어붙어 농가에도 그 타격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게다가 한창 일손이 많이 필요한 농번기에 일손이 돼주던 이주노동자들 역시 올해 초 한국을 떠나버렸다. 어려운 농가를 돕기 위해 지자체 차원에서 농산물 온라인 판매 활성화 대책을 내놓고 있는가 하면, 공영쇼핑에서는 일부 농가의 농산물을 사들여 배송비만 받고 소비자들에게 뿌리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농가 지원 정책과 행사는 당장 어려움에 처해있는 농민들에겐 작게나마 힘이 될 고마운 일이다. 다만 앞으로는 농업의 주축이 되는 지역과 지역민들이 이웃한 큰 도시에 기생하지 않고도 그들의 지역 안에서 자립할 수 있는 생활인프라 마련 대책도 함께 논의되길 바란다. 농업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이 확립되고 지역에서도 수준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면 우리 농가의 고질적인 문제로 손꼽히던 일손 부족 문제나 고령화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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