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세계가 인종차별 반대를 외치고 있다. 지금껏 미국 경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이들 가운데 흑인의 비율이 다른 인종과 비교해 유독 높았다는 건 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등 국가의 보호망에서도 그들은 소외돼왔다. 코로나19로 사망한 흑인의 비율이 다른 인종에 비해 높게 나타나는 통계가 이를 보여준다. 미국에서 흑인은 핍박받고 보호받지 못하는 집단이라는 사실이 한꺼번에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은 그간 조용히 쌓여온 미국 흑인들의 분노에 방아쇠를 당긴 사건인 셈이다.
세계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는 지금, 나는 ‘인종차별 반대’라는 그들의 구호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싶다. 그들은 진정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걸까? 아니면 단지 흑인차별에 반대하는 걸까? 지금까지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이들이 너무도 당당히 동양인을 비하하는 모습을 봐왔기에 드는 의문이다. 아이러니한 건 인종차별의 희생자인 흑인들마저 동양인을 차별하는 것을 문제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몇 해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국의 한 흑인 코미디언이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내용의 연설을 해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그를 향한 박수갈채가 잦아들고 이어진 그의 스탠딩 코미디 무대는 어딘가 불편했다. 그는 아시아계 아이 세 명을 세워두고는 “수학을 기막히게 잘하는, 앞으로 IT업계를 선도할 아이들”이라며 서슴없이 말했다. 관중석이 술렁이자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소셜미디어에 올려요. 어차피 당신들 스마트폰도 얘네(아시아계 아이들)가 만드는 겁니다.” 불과 2-3분 전까지 인종차별을 규탄하던 사람이 동양인을 보란 듯이 차별하는 광경이었다. 그가 말한 인종차별은 진정한 의미의 인종차별이 아니라 흑인차별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무대였다.
사실 동양인인 나부터도 ‘인종차별’이라는 용어를 보면 흑인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투쟁의 기록과 관련되지 않을까 싶다. 과거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무역선에 실려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간 이야기, 미국의 흑인 노예 해방과 늘 묶여 언급되는 링컨 대통령과 미국 남북전쟁 이야기, 마틴 루터 킹과 로자 팍스를 필두로 전해지는 흑인 인권운동 이야기 등. 흑인 인권과 관련된 이 역사적 기록은 지구 반대편 사람들에게까지도 비교적 자세히 전해져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상식이 된 흑인 인권 신장 운동의 기록이 사람들의 뇌리에 ‘인종차별=흑인차별’이라는 인식을 심지 않았을까.
흑인 인권 운동의 기록이 이렇게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동양인 인권 운동의 기록은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다. (있다고 해도 흑인 인권 운동의 기록처럼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이런 역사적 기록을 형성하기엔 동양인이 서구 사회에 섞여 산 역사가 굉장히 짧다. 그뿐만 아니라 서구인들은 동양을 그들의 세계와는 ‘다른 곳’, ‘신비한 곳’으로 받아들이며 타자화했다. ‘옐로 피버(yellow fever)’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서구인들이 동양 문화를 인식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서구인의 동양 타자화는 폭력으로 대변되던 흑인 차별과 달리 (물리적으로는) 비폭력적이었기에 ‘차별’이라고 인식되기 어려웠던 측면이 있지 않았나 싶다. 가시적인 구조적 차별의 역사가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양인 차별에 투쟁의 역사 역시 부족한 건 불가피하다. 어찌 보면 동양인은 강자와 약자 사이의 어중간한 포지션에서 타자화하며 오히려 더 철저히 소외 당하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이 엿보이는 건 이와 관련된 문제 제기가 시작했다는 사실 덕분이다. 얼마 전 이탈리아 프로축구 유벤투스에서 뛰고 있는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파울로 디발라가 CNN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내용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흑인 선수들이 차별받고 있는 현실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인종차별과 싸워야 하는 건 흑인만이 아니다”라며 “세계 모두가 연대할 필요가 있다”는 소신발언을 했다. 그동안 인종차별 사건으로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던 스포츠계에서, 많은 팬을 거느린 스타 선수의 입에서 이와 같은 발언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흑인차별이 아닌 모든 인종/출신에 의한 차별이며, 이를 위해 전 세계가 연대해야 한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해줬기 때문이다.
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특정 집단을 타자화 하는 것도 차별이다. 자신의 문화에선 볼 수 없었다고 하여 동양 문화를 ‘이국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구경하는 듯한 태도는 동양인을 동물원에 전시된 동물 취급하는 것과 다름없다. 수학/공학 엘리트가 많다는 점을 들어 아시아계 사람들을 웃음거리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시아계 사람들 가운데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많은 건 아시아권 국가들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국가 차원에서 수학 교육을 강화하는 방향을 택한 결과일 뿐이다. 서구 국가의 교육과 아시아 국가의 교육이 중점을 두는 것이 서로 다를 뿐 둘 중 어느 것도 틀리지 않다. 따라서 이를 웃음거리로 삼고 조롱하는 건 일종의 문화적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차별 문제를 지적할 때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오류만을 지적해왔다. 그런데 ‘다르다’라는 개념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건 낮은 수준의 인식이다. 이 낮은 수준의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배척한다”, “다르니까 존중하지 못하겠다”라는 잘못된 태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신 ‘다르다’라는 개념을 “우리는 같은 인간이고 생명이지만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만들어낸 다양성이 인간 종을 존속하게 한다”는 의미로 확장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확장된 인식이 진정한 의미의 인종차별 규탄과 세계인의 연대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