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아이를 낳지 않았지
오밤 중, 골다공증을 막으려 할머니는 우유를 꺼냈다.
닫힌 눈꺼풀 안으로도 흰 냉장고 불빛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풀린 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보랏빛 등에 이마를 맞대려고.
세상이 깜깜해졌다. 발소리가 울렸다.
베개를 주워 들고 안방으로 가는 할머니.
3장. 아이를 낳지 않았지
그 옛날,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길을 걷는데, 아기가 간판을 읽었다고 한다. 그것은 두살배기 바로 나, 도대체 얼마나 놀랍고 귀여운 존재였을런지.
한글나라를 배우는 오빠의 어깨너머 까치발을 하고 훔쳐봤다고. 국제 나이 달랑 1세, 글을 깨우쳐버렸단다. 무지하게 이쁜 아이였다 전해진다.
아기는, 초음파 사진만 나와도 무조건 예쁠 것이라며 온가족이 호들갑을 떨게 만든다. 나도 그때 동생들 보러 가서 돗자리를 깔았어야 했는데. 선구안을 자랑했어야 했다. 것 봐 봐라, 이쁘지?
나와 아버지만 공유하는 아이들이 잉태되었을 때.
명절이면 본가 어른들 보라고 데려 오는 건데, 그런 사람들보다야 아이들은 순수한 열일곱 언니를 더 좋아했다. 두 아이는 어른들과 함께 있자고 하는 아빠한테 아빠 뚱뚱하다 못생겼다 원색적인 조롱을 일삼았지만, 언니한테는 예쁘다고 말해줬다. 아이들이 확실히 솔직하다.
두 아이를 소라와 바다로 부르겠다.
소라는 애교가 많았고 벌써부터 사회생활을 잘했다. 언니한테 자기 그림 칭찬을 종용할 때면 애교를 적잖이 부리곤 했는데, 얼마나 귀엽고 스마트한 언행이었는지 모른다. 색연필로 쓱쓱 그린 소라의 핑크빛 공주 그림. 마땅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아무래도 찬사를 아끼기가 어려웠다.
옆에서 영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바다. 얼굴에 아주 엄격한 언니의 걱정이 쓰여 있다. '저게?‘
작품에 피드백을 주는 사람들이 다 애정이 있어서 그렇듯, 바다도 소라를 아끼는 거야. 그렇지?
바다도 웃으면 귀엽게 잘 웃었다. 풍문에 의하면 수학을 잘한다고 했다. 콧대가 아주 높아서 어른들이 시켜도 애교 같은 건 잘 안 해준다고 했다. 과연 귀여웠다.
나는 열일곱 언니 예쁘다는 칭찬만 한참 배부르게 받았다. 만일 “언니 멋있다” 이런 말까지 들었다면, 정말 기운을 많이 차려서 일찍 수능 준비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언니 하버드 갈 수도 있었어.
둘 다 그대로 착하게만 자라나서, 안쓰러운 언니를 제법 걱정해 주었더라면 좋았겠다. 내가 긴 생머리를 바싹 깎아서 왔을 때, 언니 못생겨졌다며 울던 막내의 얼굴을 기억한다. 찌그러진, 희고 발간 얼굴, 매우 작다는 것을 발견했다. 귀엽구나, 알게 되었다. 나는 원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거든. 얘들아.
병동의 창은 와인잔을 닮은 매끈한 유리였다. 세게 잡아당겨도 창은 열리지 않았다.
산책을 위한 인공 잔디와 꾸며낸 오솔길을 볼 수 없었다. 밖에서는 봤는데. 추울까. 며칠 전 우리 어떤 계절이었나.
새벽에 같은 병실을 쓰는 이모가 살구색 블라인드를 걷어주었다.
나는 매일 잘 드는 햇빛을 받으며 눈을 떴다.
병상에서 볕으로 밝힌 소설책을 읽었다. 누워서 문학을 독해하는 내 멋진 모습.
로비 앞을 기웃거리면, 보드게임을 고르고 있는 노소의 환자들을 볼 수 있었다.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은 때로 구슬픈 사연을 토로하며 티슈를 박스째 쓰기도 했다. 둥글게 앉아 뜨끈한 차를 홀짝이며 자조 모임 같은 것을 했다.
“병원 생활은 어때요?”
비싸 보이는 케어룸의 인테리어, 원성이 자자한 고물 런닝머신과 그렇지 않은 다른 무슨 운동기계, 정수기 근처에 비치된 다소 촌스러운 옛날 과자들, 도서 칸은 그래도 나쁘지 않다. ”괜찮은 것 같아요.” 답하면 선생님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 미소가 좋았다. 나는 전이와 역전이 개념을 익히 알고 있던 영특한 아이였기에, 지적인 안경을 달싹이는 그에게 푹 빠지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다정하신 어른이셨다.
밥식에 대한 병동의 여론이 비판일색일지라도, 나홀로 꿋꿋이 빵식을 멀리하는 지조 또한 나는 갖추고 있었다. 사흘 전 흥건하게 피를 쏟아내던 몸으로도, 반찬과 밥을 나는 맛있게 소화해냈다. 다행이었다.
우울은 순탄하게 마모되어 갔다. 그렇게 섬에서 쫓겨날수록, 모국과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머문다면, 나는 영원히 행복할지도 모르겠다고.
여자는 수건을 개고 있었다.
포도를 물들인 수건들. 차곡차곡 정돈되어 갔다. 세계는 보랏빛.
여기는 아빠의 집.
둘러보면, 테이블 위에 유아 교정용 젓가락, 쿠키 상자와 쿠션 인형이 있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구나. 이름이 뭐였지.
잠깐 있다 가라. 여자가 말했다.
새엄마라고 부르지는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