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었어요”
항상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한때 누가 먼저 호감인지도 모르게 확 친해졌다가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아무런 사이도 되지 못한 사람.
그러다 얼토당토않게, 이사 간 집 근처에서 그 친구를 보게 되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냈다던 한 인디언의 기도처럼
'보고 싶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더니 정말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살던 동네에서 바로 옆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가 그리 가까이 살고 있는 줄 몰랐다.
엄한 곳을 지날 때마다 그 친구를 떠올렸으니까.
그러고 보면
보고 싶지 않았던 적이 없던 것 같다.
그런데 볼 수 없으니
몸은 축 쳐지고 늘 가냘프게 슬펐다.
함께 갔던 카페를 가도
다른 사람과 연극을 보러 가도
맞추어 보던 기타 연주와
우릴 만나게 했던 운동을 해도
늘 그가 그리워 오랫동안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사람을 향한 나의 여운은, 길었다.
그렇게 무수히 뿌려 놓은 '보고 싶다'의 나날 중에
딱 하루 그 친구를 만난 것이다.
이사 간 첫날에, 멀리, 혼자서.
그런데 또 만났다.
무려 그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서 한 번 더.
나는 쫓아가 아는 체를 하고
우리는 적당히 안부를 묻고 각자의 회사로 향했다.
호감을 들킨 사이이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 생각이 나 친구로서도 참 반가웠다.
하루를 다 보내고, 퇴근길엔 더 구체적으로
‘왜 보고 싶었을까?’를 생각해 봤다.
그 질문에 꼬리를 물다 보면 도착하는 마음.
아직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데
사랑으로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치고 있었던, 수다스러움과 활발함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 친구가 날 좋아할 거라 의심했지만 나도 못지않게 좋아했다.
식당에서 이모님들께 넉살을 부리는 것도 좋아하는 모습 중 하나였다.
성격은 달랐지만 좋아하는 것들이 비슷해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호감이 동시에 시작된 줄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나만 온도가 높아진 걸 알고는 늘 애가 탔다.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할 때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애 덕분에
나는 이제 “사랑한다”는 말없이도
사랑을 말할 수 있게 됐다.
마음은 쌓이는데 말의 도착지가 요원할 때
그리움이 가득한데 볼 수 없을 때는
꼭 시인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탄생한 이런 문장들.
시인은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이다.
지나간 것에 대한, 혹은 오지도 않은 것에 대한 그리움.
‘보고 싶다’는
“보고 싶었어요”가 될 수 있을까?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지만
결국 “보고 싶었어요”를 전하진 못했다.
그렇게 관계는 흐지부지 끝이 났다.
'그래도 한 번은 봤네...'
그러나 그때의 내가 가진 ‘보고 싶었던 마음’은 생생하다.
카카오톡에 늘 그 친구의 이름 끝 글자를 검색해 보던 습관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람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것이 남았다.
‘보고 싶음’의 뿌리를 파보면
‘보고 싶다’는 말이
내게 사랑의 쉬운 표현이 됐다는 것 하나.
나는 이제 “사랑한다”는 말을 아껴도 내 마음을 다 전할 수 있게 됐다.
“보고 싶었다”고 둘러 말하면 되니까.
그리고 누군가 나를 “보고 싶다”라고 말한다면
“나를 좋아해 주는구나, 사랑하는구나” 안심하고 오해한다.
‘왜 보고 싶은지’를 생각하다 보면
항상 그렇다.
좋아하지 않고서는
보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
'그리움'을 이미지로 표현해야 한다면
어떤 사진이 좋을까? 한참 고민했습니다.
노을이 지는 모습을 보다가 밤이 됐을 때
달 하나가 떠오르면 좋겠더군요.
세상에서 유일한 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할머니, 보고 싶다.
뉴진스, 보고 싶다.
아, 맞다!
J야,
네가 아니어도 됐어야 했는데
너여야 했던 날들이 참 길었던 것 같아.
나에게는 소중했던
‘그리움’의 감정을 알려줘서 고마워.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 들었어.
앞으로도 그러길 멀리서 빈다.
* arazuda의 글, 유튜브로 들어보세요!
브런치로 오디오/팟캐스트도 만들고 있어요.
AI가 아닌 제 목소리로 여러분과 수다를 떨고 싶어요.
이 시도를 응원하고 귀 기울여 주신다면
오늘도 계속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