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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Jul 04. 2022

서울카페기행: 카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8호_2주년_잡담의 오늘

작성 : 프로잡담러 I

게재 : Vol.8 2주년, 2019년 여름


 

0. 대체로 기억 미화


여름은 그리운 계절이다. 새파란 하늘과 쨍한 여름꽃들을 흔드는 선선한 바람, 사진 속의 추억들. 겨울을 나는 동안 그리워했던 기억 속의 여름은 그런 것들이지만, 매번 장마철의 시작과 함께 이는 필시 시간과 추위가 왜곡한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내게 여름은 카페의 계절이다. 매년 한여름으로 접어들 즈음이면 책과 만년필과 사진기를 들고 에어컨을 찾아 온갖 카페를 전전한다. 글이나 그림 작업이 핑계라면 작업하기에 더 좋은 곳이 있지 않으냐는 핀잔을 듣지만 내가 카페에 가서 하려는 것, 얻고자 하는 경험은 그러한 단순한 활동―노동―뿐만이 아니므로 도서관도, 독서실도 결코 카페를 대체할 순 없다. 적당히 조용한 카페의 편안한 1인용 소파에 늘어져 책을 펼쳐 들고 에어컨을 쐬는 것 이상의 행복은 없다. 나의 그해 여름은 그런 공간들의 이름으로 남는다.
 

 

1. 알파 스페이스(α-Space)


사람들은 공부하러, 책을 읽으러, 혹은 과제를 하러 카페나 도서관으로 나가 자리를 잡는다. '카페'라는 공간이 본래 유도하는 활동은 혼자서 하는 그러한 활동들보다는 타인과 마주 앉아 커피를 즐기는 것이고, 그 외의 활동들은 집의 내 방에 있는 책상에 앉아서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공부하기엔 독서실이 더 적합하고 도서관에는 끝없이 늘어선 서재뿐 아니라 조용하고 쾌적한 공간과 에어컨도 있다. 더 편안하고 각 활동을 위해 특화된 공간들이 있는데 왜 굳이 집도, 작업실도 아닌 곳으로 가려고 할까?


인간의 윤택한 삶을 위해선 한 용도로 분류되거나 그에 특화되지 않은 공간이 필요하다. 주거 및 휴식을 위한 집, 업무를 보기 위한 일터는 각각 그 용도에 맞는 가구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과는 달리 특정한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제3의 공간, '나와 있다'는 개념에 더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장소들은 조선 시대의 정자에 해당하고 현대 사회에서는 카페로 대표된다.


혹자는 이러한 성격의 카페가 전통적인 주거 시스템의 변화로 인해 약화한 거실의 기능을 대체한다고도 한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단칸방이 휴식 이외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게 되면서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새로운 공간, 건물 유형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휴식을 취하면서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활동들을 하기에 마땅한 공간이 없기 때문에―도서관이 할 말이 많겠지만 거리마다 없는 곳을 찾기가 더 힘든 카페에 비해 접근성의 문제도 있고, 사람들이 더는 책을 읽지 않게 되면서 도서관 자체에 대해 느끼는 심리적 장벽도 현 양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카페로 찾아들었고, 카페라는 건물 유형은 '커피집', 음료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소 이상이 되었다. 용도를 정의할 수 없는 일종의 중립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근래에는 이 중립적 공간들을 주거 시스템 안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알파하우스를 꿈꾸다』에서 임창복 전 건축학과 교수는 이를 '알파룸'으로 명명했다. 거주자가 필요에 따라,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가변적이고 자유도 높은 공간이라는 의미다. 기존의 아파트 모듈 내의 여유 공간―베란다나 창고 등의―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강의를 하거나 세미나를 진행하려면 그에 걸맞은 크기의 공간과 시설들이 필요하므로, 거주를 위해 꾸며져 있는 기존의 방들에서는 불가능한 활동이다. 이때 알파룸은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거주 공간 내부의 중립적 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한다. 오롯하게 주거 측면에서 효율화된 공간인 아파트, 살림집과 구분된 '덤'의 공간. 건축주의 필요성에 따라 구성하고 점유할 수 있는, '용도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공간'이 바로 알파룸이다.

 


2. café[카페]


그러므로 한국의 카페는 말하자면 알파 스페이스다. 특정한 프로그램에 국한되지 않으면서도 '좋은 환경'에서 적당한 시선들이 오가는 가운데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


한국의 카페 문화는 타국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유별날 정도로' 카페를 찾는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과 대화를 하러, 식사 후 본격적으로 근황을 나누러, 미팅을 하러. 사회 전체의 거실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말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이러한 카페의 성격은 물론 한국의 문화적 배경, 공간에 대한 수요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진1] 테이블과 의자가 빼곡히 늘어서 있지만 공간이 넓어 옆 테이블이 크게 신경쓰이진 않는다. 오랫동안 공부를 하거나 작업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카페 공간 유형; 카페라고 부르는 것


각 카페를 만들어낸 필요가 다르므로 공간 유형 또한 천차만별이다. 조용히 공부를 하기 위해 찾는 곳과 친구와 오랜만에 약속을 잡고 사진을 찍으러 찾는 곳, 밤새 작업을 하기 위해 찾는 곳이 전부 다르다. 하나의 공간 유형인 '카페'인데도 각각 성격과 용도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차별화는 카페를 구성하는 아주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이뤄진다. 테이블 하나에 대해서만 논하더라도 크기와 높이, 위치, 개수, 테이블 간 간격, 콘센트까지의 거리 등이 전부 유효한 변수들이다.


매력적인 비주얼을 만들어내는 방식 또한 한국의 카페 양상에서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다양한 채널을 통한 컨텐츠 생산과 자기PR의 시대에 카페들 또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기여하고 있다. 소위 '인스타 감성'이라고 불리는 카페들은 인터넷에 업로드되는 사진과 영상들의 배경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일상적이지 않은 색채들을 감각적으로 다루고 그에 어울리는 오브젝트들을 적절하게 배치해 꾸며낸 공간들은 일종의 스튜디오로서 기능한다. '예쁜 공간'에서 더 나아가 카페 자체에 독특한 컨셉을 부여하는 경우도 있다.


[사진2] 넓고 층고가 높은 공간을 아주 여유롭게 쓴 카페. 넓은 테이블 간격에 더해 파티션이나 화분을 자연스레 배치해 시 · 청각적 프라이버시 요구를 만족시켰다.


프라이버시


공간 유형에 상관없이 카페가 알파 스페이스로 기능하기 위해선 적절한 시선 차단과 유도를 통한 프라이버시 조절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불특정 다수로부터의 시선이 차단되는 동시에 자신은 외부를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자리를 선호한다. 폐쇄 정도에 대한 선호도는 각자가 다르겠지만, 넓은 로비의 한가운데에 어떤 벽도 면하지 않은 채 노출된 테이블은 대개 매력적인 자리가 아니다.


프라이버시는 시각뿐 아니라 청각과도 간접적으로 연관된다. 엄폐물이 소음을 흡수하고 차단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리를 내는(혹은 소리를 듣는) 상대가 보일 때와 보이지 않을 때 주의가 집중되는 정도가 다르므로, 공간 디자인 시 시각/청각상의 프라이버시는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작은 카페에서는 공간 전체에 대화가 들릴 것을 지나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있도록, 큰 카페에서는 사방의 테이블에서 들리는 소리에 묻혀 대화가 힘들어지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프라이버시는 여러 요소들을 조작함으로써 조절할 수 있다. 간단하게는 테이블 사이에 파티션을 설치할 수 있고, 구조 기둥들을 이용하여 더 자연스럽게 시선을 차단하는 방법도 있다. 2층 이상의 건물에서 계단실을 따로 빼지 않는 경우에는 계단을 통해 외부로부터 차단된 구석진 자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공간 자체의 크기가 커질수록 아무런 엄폐물도 없이 고립된 테이블을 만들지 않기가 어려워지므로, 디자인 초기 단계부터 공간 구획을 통해 테이블 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을 진행하는 것이 좋다.
 


3. 'Pleasant Space'


이렇게 현대 사회의 제3의 공간이자 거실이 된 카페는 이제 너무 많아졌다. 유명 프랜차이즈 브랜드는 한 블록에 하나씩, 심할 경우 도로 건너편에 서로 마주 보고 지어질 정도로 많다. 최근 젊은 층을 주 타켓으로 하여 떠오르는, 성수동이나 익선동 등의 핫 플레이스에는 어김없이 개인 카페들이 몇 블록씩 늘어선 카페 거리가 생겨난다. 식사한 후 카페에 가는 루트가 보편화하면서 식당가 주변을 카페들이 둘러싸고 있는 거리 풍경도 익숙해졌다. 이태원 경리단길의 바리에이션인 'X리단길'은 각 도시의 웬만큼 이름있는 관광지 근처에서 적어도 하나씩은 찾아볼 수 있다.


카페의 역할이 변하면서 수요가 늘어남과 동시에 공급이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레 탈락 현상이 일어났다. 유명 카페 거리는 개인 카페들이 주류를 이루며 자생하는 구조지만, 그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 브랜드 로고를 달지 않은 개인 카페는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수가 급증함에 따라 밀려난다. 이들은 단골 이용자가 많은 법한 거주 밀집 지역에서나 간간이 볼 수 있다.


이러한 과 공급 상태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카페들은 어떻게든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전략은 다양하다. 아직 공략할 수 있는 이용자가 많은 지역에 터를 잡거나, 커피 로스팅 실력으로 경쟁하거나, 독특한 메뉴를 간판으로 내세우거나, 또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으리만치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거나. 괜찮은 길목이나 주거 지역의 터는 이미 다 나갔을 것이고 커피와 커피 음료 자체만으로 어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다른 조건의 제약으로부터 가장 자유롭고 또 확실하게 매력 포인트가 될 만한 것은 역시 공간이다. 알파 스페이스로서의 카페의 정체성에 기반하여 머물기에 좋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작업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공간. 이왕이면 예쁘고 편안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을 것이 당연하므로.


그렇다면 그 '매력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각적으로 예쁘게 꾸며진 공간일 수도 있지만, 몇 시간이고 편안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소박하고 조용한 공간일 수도, 독특한 재료를 사용해 분위기를 만들어 낸 공간일 수도 있다. '카페' 하위의 공간 유형 분류만큼이나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요소들도 천차만별이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반드시 화려한 비주얼을 가리키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진3] 그냥 좋아하는 공간. 굳이 이유를 대자면 바람이 잘 통하고 햇살이 테라스를 통해 예쁘게 든다.


건축가는 언제나 매력적인 공간에 대해 고민한다. 가고 싶은 곳, 내가 지내고 싶은 곳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곳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그 과정에서 한 학기에 한두 번씩은 꼭 'Pleasant Space'라는 말을 듣게 된다. 주로 프로젝트 후반에 사용자가 어떤 공간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장면을 보게 될지를 상상하며 머리를 쥐어짤 때 듣는 말이다. 대체 그게 뭐냐고 묻기엔 내게도 특히나 사랑하는 공간들이 있다. 건물 크기나 설계 규모, 투입된 예산과 관계없이 그냥 좋은 공간들이 있다. 오래된 건물에 페인트를 바르고 필요한 것들만 늘어놓아 소박하게 꾸민 스튜 가게의 전창에 해가 들이치는 걸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게 건축이고, 그래서 더욱 알 수 없다.


카페의 적당한 백색 소음―유리컵이 부딪치는 소리, 물 따르는 소리, 문이 열릴 때마다 스쳐 지나가는 거리의 소리―과 커피 향이 없이는 작업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특별히 사랑하는 공간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각자의 'pleasant space'는 아주 다른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므로, 이번엔 내가 사랑하는 공간을 이루는 요소들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4. 내가 사랑하는


내게 필요한 공간의 조건은 몇 가지로 추릴 수 있다.


1. 시끄럽지 않을 것. 카페에는 주로 작업을 하거나 길고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가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층고가 높고 개방적인 공간을 좋아하는 이상 소리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지만, 센스 있는 공간 분할을 통해 소음을 분산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한 곳을 주로 찾는다.


2. 의자가 편안할 것. 맘 편히 묻혀서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노트를 만지작거릴 수 있는, 내 몸에 맞는 의자가 있어야 한다.


3. 마음에 드는 자리가 있을 것. 우선 프라이버시 상의 균형을 적절히 맞춰야 한다. 너무 폐쇄적이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구석에 위치해 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나 카페 공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한쪽 구석을 좋아한다. 또, 작업 효율을 위해 테이블과 의자는 너무 높거나 낮지 않은 편이 좋다―캐드 작업 시에는 특히 중요하다. 커피 테이블에는 노트북을 놓고 도면을 칠 수 없으니까.― 노트북을 사용할 경우에는 충전기 줄이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늘어뜨릴 수 있는 정도의 위치에 콘센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외에도 공간 자체에 대한 취향을 말하자면 빛이 적절히 들고 음영 대비가 매력적으로 부각되는 공간을 좋아한다. 외부는 가능한 한 보이는 편이 좋으므로 한쪽 벽면을 전창이나 폴딩 도어(folding door)로 만들었다면 웬만해선 합격점이다.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면 사실 커피 맛은 체크리스트의 우선순위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커피의 품질에 별로 민감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방문할 때마다 내가 지불하는 음료 값에는 커피의 향과 맛에 공간에 매겨진 값이 합산된다는 말이다. 모든 요소를 고려했을 때 그 가격이 합당하다면 그 카페는 모종의 작업을 위한 알파 스페이스가 필요할 때 내가 떠올리는 선택지 중 하나가 된다. 물른 이들 또한 자체적으로 카테고리에 따라 분류된다. 공간도 커피 맛도 그럭저럭하고 그만큼 가격도 적당한 카페―자주 가기에 좋은―, 음료값이 많이 비싸지만 공간이 아주 매력적이어서 오랫동안 작업할 일이 있을 땐 기분을 낼 겸 갈 만한 카페, 인테리어가 좋고 음료와 사이드 메뉴들의 플레이팅이 성의있어서 친구를 데려와 소개해 줄 만한 카페 등. 제도 도구가 갖춰진 설계실보다 카페 구석 테이블을 좋아하는 히치하이커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는 이런 것들이 정리되어 있다.


이 글은 작업을 위해 장마철 거리를 헤매던 중 발견한 집 앞의 카페에서 쓰였다. 이곳이 단번에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선택된 것은 전창을 면한, 노트를 편하게 쓸 수 있는 높이의 테이블과 편한 의자가 있는, 혼자서 차지할 수 있을 만한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커피 맛과 가격도 이만하면 괜찮다. 올해 여름은 이 자리에서 쓴 글들의 이름이자 이 공간의 이름으로 남게 될 것 같다.
 

[사진4] 어느 테이블에 앉아도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아 올 여름 친구들을 데리고 가장 많이 들렀던 곳. 작은 다각형의 땅에 공간을 알차게 써서 2층으로 지어 올렸다. 다락처럼 느껴지는 2층이 특히 매력적이다.



참고문헌

임창복, 임동우, 『알파하우스를 꿈꾸다』(2016)


도판출처

그림 1, 2, 3, 4 전체 김정인 그림


 

 

  


WRITTEN BY

프로잡담러 I |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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